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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 조금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도류라는 말을 알고 있다. 일본의 검술에서 양손에 검을 들고 공격과 수비를 해내는 기술을 말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한다는 의미도 있다. 일본어에서 나왔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사용된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선수가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는 일을 칭하고 있다. 

일본에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야구선수 오타니를 말할 때 이 말이 꼭 들어간다. 오타니는 세계 최고 레벨의 야구 리그에서 투수로서 타자로서 모두 성공의 역사를 쓰고 있다. 애초 그는 일본리그에서 투. 타를 겸하는 선수로 명성을 날렸고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오타니는 이를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서 투. 타를 겸하는 선수에 도전했다. 애초 일본 리그와 메이저리그는 다르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오타니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투수와 타자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거두고 있다. 이제는 그의 투. 타 겸업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투. 타 겸업 선수로 메이저리그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KBO 리그 역사에도 투. 타를 겸했고 함께 성공의 이력을 쌓았던 선수가 있다. 과거 해태 타이거스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던 김성한이 그 주인공이다. 김성한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해태 타이거스 선수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95년 현역 은태까지 해태 타이거스의 원클럽맨이었다. 이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해태 타이거스를 이은 KIA 타이거스의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해태  타이거스의 역사와 함께 한 선수였다. 

 

 

 



프로 원년 김성한은 프로야구 역사에서 더는 나오기 힘든 대기록을 남겼다. 1982 시즌 김성한은 전기리그와 후기리그가 나뉘어 있는 시즌 전. 후기 80경기에 모두 출전해 0.305의 타율에 13홈런 69타점의 리그 상위권 성적을 타자로 남겨다. 그와 함께 그는 투수로서 26경기 106.1이닝 투구를 하면서 10승 5패 1세이브 방어율 2.79의 성적을 기록했다. 투. 타 모든 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이었다. 그는 해태의 중심 타자였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전천후 투수였다. 

이런 김성한의 활약은 그의 재능도 뒷받침됐지만, 팀 상황이 그의 투. 타 겸업 이도류를 불가피하게 했다. 당시 해태는 뒤늦게 프로야구팀 창단을 결정했다. 준비 과정이 부족하기도 했고 지역 연고제를 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호남지역은 상대적으로 연고지 내 고교팀이 적었다. 여기에 구단의 자금력도 여타 재벌들이 대부분인 다른 구단에 비해 부족했다.

프로야구팀을 창단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지역 안배를 고려하기도 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등으로 당시 정권에 큰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지역 정서를 무마시키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호남 지역 프로야구 팀의 창단을 추진하기도 했다. 

창단은 했지만, 해태 타이거스는 선수 부족에 시달렸다. 추후 충원이 됐지만, 14~15명 정도의 선수로 선수단이 구성됐다. 야수 9명을 제외하면 투수 숫자는 장기 레이스를 치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야수 중 누군가 마운드에 서야 했고 투구 경험이 있었던 김성한이 투수로서 준비를 해야 했다. 불가피한 선택의 결과가 김성한의 투. 타 겸업이었다. 

하지만 그의 투. 타 겸업은 기대 이상이었다. 김성한은 타자로서도 투수로서도 성공적이었다. 프로 원년 프로야구의 수준이 아직 정상궤도에 올라오지 못하고 아마 야구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지만, 장기 레이스에서 투수와 타자를 병행하며 시즌을 완주하고 성과를 냈다는 점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후에도 김성한의 투. 타 겸업은 계속됐다. 하지만 투수로서의 비중은 점점 낮아졌다. 1986시즌 한 경기 마운드에 오른 이후 김성한의 투수로서의 이력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김성한은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그의 커리어를 쌓았다. 그는 1985년과 1988년, 1989년 3시즌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1985년과 1988년에는 정규리그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김성한은 이에 더해 1988년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시즌 30홈런을 달성했고 1989년에는 26홈런 32도루를 달성하며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20-20 클럽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김성한은 프로야구가 초창기를 지나 최근 인기 스포츠로 자리를 잡는 시기 프로야구 인기를 이끌었던 선수였다. 김성한을 중심으로 김봉연, 김종모, 김일권까지 김 씨 타선은 해태의 전성기를 이끈 주축이었다. 해태는 이들의 활약과 국보급 투수 선동열 등이 가세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다. 해태 특유의 검은 바지에 빨간 상의의 원정 유니폼은 상대 팀에게는 큰 공포감을 주는 모습이었다. 

해태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타 팀을 압도했고 포스트시즌에서 매우 강했다. 당대 최고 팀이었던 삼성은 이 해태에 밀려 번번이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다. 해태는 크게 부족한 지원과 열악한 구단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선수들의 강한 의지가 클래스로 강팀의 자존심을 지켰다. 김성한은 그런 해태의 중심 선수였다. 그는 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또 다른 거포 이만수와 함께 리그 홈런타자로서 해태와 삼성의 라이벌 구도 속 라이벌로 경쟁하기도 했다. 

김성한은  특유의 오리 궁둥이 타법, 백스윙을 줄여 타격 스피드를 늘리기 위한 타격 폼으로도 유명했다. 방망이를 최대한 뒤로 숙이고 엉덩이를 뒤로 쭉 뻬는 자세는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자세였다. 김성한은 자신만의 타격폼을 완성해 리그 최고 타자의 반열에 올랐다. 

 

 

 

 

 


김성한의 타격은 국제 경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프로야구 최초로 한국과 일본의 올스타 선수들이 대결했던 한. 일 슈퍼게임에서 김성한은 일본 투수들의 공에도 잘 대응하는 타격을 했다. 1991년과 1995년, 1999년 세 차례 열었던 한. 일 슈퍼게임은 일본에 한 수 위라는 평가 속에 진행됐고 실제 경기 내용도 우리 올스타팀이 밀리는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김성한은 1991년 대회에서 일본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진다는 이라부의 공을 공략해 홈런을 때려내며 KBO 리그의 자존심을 지켜내기도 했다. 

화려한 선수 생활을 마치고 1995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김성한은 이후 해태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01년 해태가 KIA로 인수되던 시기 해태의 마지막 감독으로 활약했다. 해태는 1990년대 후반 IMF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였고 팀 간판선수인 선동열과 이종범을 일본 리그로 이적시켜야 했다.

선수들의 의지도 강했지만, 해태는 그 선수들의 클래스에 맞는 대우를 해줄 수 없는 형편이었고 구단 운영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결국, 선동열과 이종범은 막대한 이적료를 남기도 팀을 떠났다. 이후에도 팀 주력 선수들이 석연치 않은 트레이드로 팀을 떠났다. 강 팀 해태의 위용은 사라져갔다.

2000 시즌 이후에는 해태 전성기 역사와 함께 했던 김응용 감독마저 삼성으로 떠나면서 해태 왕조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성한은 쓰러져가는 해태 왕조를 마지막까지 지킨 인물이 됐다. 이후 그는 KIA 타이거스에서 감독을 역임했고 한화 이글스의 수석코치 등을 역임했다. 지도자로서 김성한은 선수 시절 수없이 경험했던 우승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아쉬움에도 선수 김성한은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겼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앞으로도 하기 어려운 정규 시즌 투. 타 겸업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외에도 김성한은 위대한 타자이기도 했다. 그는 프로야구 40주년을 맞이해 40인의 레전드에 선정됐다. 그는 충분히 그에 걸맞은 활약을 했던 레전드였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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