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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을 맞이해 KBO에서 선정해 발표하고 있는 40인의 레전드 중 가장 최근의 주제는 우타 거포를 대표하는 선수 4명이었다. 그 이름은 빙그레와 한화를 거치며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큰 활약을 했던 장종훈, 두산의 구단 역사에 남을 우타 거포 3인방인 김동주, 심정수, 외국인 타자 우즈가 그들이었다. 

이 중 장종훈은 프로야구 초기 당시로는 생소했던 연습생, 지금의 신고 선수 신분으로 입단해 최고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1992 시즌 KBO 리그 역사에서 최초로 정규 시즌 40홈런을 돌파한 선수였고 1991시즌과 1992 시즌 장정훈 지수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타격 각 부분에서 상위권에 자리할 정도로 리그를 지배했던 선수였다. 그는 빙그레와 한화로 팀 명이 바뀌는 과정에서도 원 클럽 선수로 이글스와 함께 했고 은퇴했다. 지금도 그는 한화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이런 장종훈이 1990년대 초반을 평정한 우타 거포였다면 김동주, 심정수, 우즈는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리그를 대표했던 우타 거포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OB와 두산으로 이름이 변화했던 베어스에서 활약했고 1998시즌부터 2000 시즌까지 중심 타선을 구성했다. 이들을 두고 야구팬들은 우동수 트리오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동수 트리오는 그만큼 강력했고 리그 최고의 클린업 타선이기도 했다. 

우동수 트리오는 1998 시즌 85홈런 265타점, 1999 시즌 87홈런 295타점, 2000시즌 99홈런 308타점을 기록했다. 이들 우타 거포 트리오는 두산을 강팀으로 만들었다. 어느 누구 하나 소홀할 수 없는 타격 생산력을 갖춘 이들은 상대 팀에는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김동주

 


우동수 트리오 중 김동주는 두산의 레전드로 두산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유일한 선수다. 그는 두목곰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베어스를 상징하는 선수로 기억된다. 아마 야구 시절부터 기량을 인정받은 그는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입단하지 않고 대학교 진학을 선택해 프로야구 데뷔가 늦었다. 하지만 아마 야구 시절 그는 국제경기에서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다. 특히, 일본전에서 김동주는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로 할 수 있는 우에하라에게 매우 강했던 김동주였다. 

1998 시즌 대학 졸업 후 두산에 입단한 김동주는 데뷔 시즌부터 24홈런을 때려내며 팀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김동주는 거구의 몸이었지만, 3루수로서 뛰어난 수비 능력을 선보였다. 김동주는 뛰어난 장타력에 정교함을 더한 완성형 타자였다. 이른 타자가 안정적인 수비를 하는 3루수로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건 팀에는 큰 플러스 요인이었다. 김동주 이후 거포형 타자가 3루수로 자리하는 게 일종의 공식이 됐다. 

완벽한 타자의 전형이었던 김동주는 국가대표로도 활약을 이어갔다. 그의 타격은 국제 경기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그는 두산 뿐만 아니라 국가대표에서도 중심 타자였다. 하지만 국가대표로 출전한 2006년 제1회 WBC는 그의 야구 인생에서 큰 시련을 안겨줬다.

그 대회에서 김동주는 내야 안타성 타구를 때리고 1루로 전력 질주를 했고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투지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김동주는 어깨에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그 대회에서 한국은 미국과 일본, 중남미 팀 등 한 수 위라 평가되는 나라들을 차례로 꺾고 4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 이를 기점으로 프로야구는 침체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김동주는 부상으로 그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선수 생명이 끊어질 수 있는 상황이 그에게 찾아왔다. 

김동주는 강한 의지로 부상 재활을 했고 2006 시즌 도중 복귀했다. 이후에도 김동주는 팀을 대표하는 리그를 대 대표하는 우타자로 그 활약을 이어갔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멤버로 금메달의 영광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는 좌타자들이 점차 득세하면서 점점 그 수가 줄어드는 우타자를 대표하는 선수로도 가치가 있었다. 비록 선수 생활 후반기 사생활 문제와 구단과 팀 내 구성원들과의 갈등 등으로 이미지가 손상되고 제대로 된 은퇴식 없이 선수 생활을 조용히 접은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두산은 물론이고 야구 팬들은 야구 선수 김동주를 기억하고 있다.

김동주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우타 거포 심정수는 고교 졸업 후 프로에 뛰어들었다. 그는 철저한 식단 관리와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근육질의 몸을 만들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심정수는 프로 데뷔 2년 차부터 엄청난 장타력을 과시했다. 프로 데뷔 2년 차인 1995 시즌 OB 베어스에서 심정수는 21홈런을 기록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넓은 잠실 야구장은 홈런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경기장이었다. 심정수는 어린 나이에 이미 잠실 구장의 벽을 넘었다. 그해 OB는 한국시리즈에 우승을 차지했고 심정수의 선수 이력에 우승이 추가됐다. 

 

 

심정수

 



이후에도 심정수의 거포로서의 활약은 지속됐다. 하지만 그의 선수 커리어는 두산에서 이어지지 못했다. 2000시즌이 끝나고 심정수는 돌연 현대 유니콘스의 심재학과 트레이드 되어 팀을 떠났다. 아직 20대 나이의 전도유망한 우타 거포를 트레이드한다는 건 쉽게 이해되기 힘든 일이었다. 이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트레이드는 심정수가 한층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현대에서 심정수는 힘에 기술을 더하며 더 완성된 타자가 됐다. 그는 이승엽과 함께 리그 좌. 우 거포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홈런타자를 대표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심정수는 FA 자격을 얻은 2005 시즌을 앞두고 삼성 라이온즈와 당시로는 파격적인 4년간 60억 원의 대형 계약을 체결하며 팀을 옮겼다. 

아쉽게도 삼성에서 심정수는 홈런 타자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더 나은 경기력을 위해 감행한 라식 수술 후유증으로 공을 보는 시야에 장애가 생겼고 타격 정확도에 문제를 초래했다. 여기에 크고 작은 부상이 이어지며 경기력이 급격히 저하됐다. 어쩌면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몸을 혹사하며 몸을 만들고 혹독한 훈련을 했던 그의 몸이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였다. 결국, 심정수는 2008 시즌을 끝으로 재기하지 못하고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통산 300홈런과 1000타점을 넘어서며 리그 우타 거포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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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타자 우즈는 1998 시즌부터 2002 시즌까지 5시즌 두산에서 활약하며 통산 174홈런과 510타점을 기록했다. 길지 않은 KBO 리그 선수 생활을 고려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우즈는 1998 시즌 KBO 리그 최초로 시행된 외국인 선수 제도와 함께 두산과 인연을 맺었다. 

우즈는 데뷔 초기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내 적응했고 괴력의 타자로 거듭났다. 우즈는 1998 시즌 당시 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 이승엽을 제치고 42홈런으로 이 부분 타이틀을 차지했고 103타점을 기록하며 정규리그 MVP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에도 우즈는 매 시즌 30홈런 이상 100타점을 돌파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거듭났다. 2001 시즌에는 앞서 언급한 우동수 트리오의 일원으로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런 우즈는 외국인 선수 제도 시행 이후 가장 성공적인 선수 영입의 예로 지금도 거론되고 있다. 우즈는 성적 외에 뛰어난 친화력과 모범적인 선수 생활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외국인 선수가 아니라면 팀의 레전드로 남을만한 선수였다.

 

 

타이론 우즈

 



하지만 우즈는 외국인 선수라는 신분적인 제약을 극복할 수 없었다. 2002시즌 우즈는 이전 시즌 보다 부진한 25홈런 82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후 재계약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우즈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일본 리그로 떠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리그와 우리 리그의 연봉차는 매우 컸다. 외국인 선수들의 연봉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우주는 기량이 내림세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뒤집고 일본 리그에서도 홈런 타자로 활약했다. 그는 KBO 리그는 물론이고 일본 리그에서도 홈런왕에 올랐고 우승 멤버가 되기도 했다. 두 나라 리그에서 그는 성공의 이력을 쌓았고 엄청난 부를 얻기도 했다.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그를 지명한 두산의 안목과 우즈의 새로운 리그에서의 성공 의지가 결합된 결과였다.  

이렇게 김동주, 심정수, 우즈의 우동수 트리오의 활약은 눈부셨다. 지금도 이들을 추억하는 두산 팬들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실적을 남긴 그들이었다. 개개인으로도 이들은 충분히 레전드로 불릴만한 성적을 기록했다. 두산은 이들의 해체된 이후 더는 이와 같은 파괴력을 가진 클린업 트리오를 가질 수 없었다. 리그 전체로도 우동수 트리오만큼 공격력을 갖추고 상대에 위압감을 주는 클린업의 존재는 쉽게 찾기 어렵다.

무엇보다 우동수 트리오는 대표적인 투수 친화 구장인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 성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이 가치가 있고 이들 이후 프로야구는 식단 관리와 강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벌크업과 파워를 높인 타자들이 중심 타선의 중요한 트렌드가 됐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즉, 우동수 트리오의 존재는 20세기와 21세기가 교차하는 시기, 리그의 흐름을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사진 : KBO,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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