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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중국 그리고 한 인물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주요 부분 수상을 휩쓸며 큰 화제가 됐다. 재목은 '마지막 황제', 이탈리아 영화의 거장 베르나르로 베르톨루치가 감독을 했고 이탈리아, 영국, 중국이 합작하여 제작한 영화는 중국에서는 최초로 자금성에서 촬영을 했고 현장감을 높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1908년 황제에 즉위한 이후 신해혁명을 이후 폐위, 일제가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 황제, 그리고 일제의 폐망과 함께 전범이 되어 수용소 생활을 한 후 평범한 시민으로 여생을 보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웅장한 스케일과 철저한 고증을 더한 시대극으로 작품성도 인정받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9개 부분 수상작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도 성공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마지막 황제의 메인 테마 음악은 지금도 광고나 방송 등에서 배경으로 사용될 정도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렇게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은 영화, '마지막 황제'의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중국 현대사와 함께 할 수 있다. 그의 삶만큼 중국의 현대사는 굴곡이 심했고 극적인 순간이 연속됐다. 그 대부분은 고난의 역사이기도 했다. 푸이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푸이 (오른쪽)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왕위


푸이의 생애는 청나라의 쇠락 과정과 함께 한다. 청나라는 한때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초거대 강국이었다. 청나라는 서양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된 대항해 시대 이후 서양과의 무역에서도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현재에 안주해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서양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며 국력을 키우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사이 청나라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는 1840년, 1856년 두 차례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와 서양의 위치가 역전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청나라 군대는 서양의 군대에 힘없이 무너졌다. 청나라의 서양 군대를 상대로 그들을 지킬 힘이 없었다. 그 결과 청나라는 서양 국가들과 난징조약과 베이징 조약 등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는 청나라가 무역항을 개항하고 기존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런 개항은 강요된 개항이었고 서양의 이익에 입각한 일이었다. 이후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의 이권 다툼의 장이 됐다. 심지어 그들이 오랑캐로 여겼던 일본도 이에 가세했다. 이후 청나라는 자체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등 과거 영광을 되찾기 위한 시도도 있었지만, 낡은 체제를 개혁하는 등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성공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1894년 청. 일 전쟁에서의 패전은 한반도에게 그들이 영향력을 완전히 잃는 일이었고 동아시아의 패권 역시 일본에서 넘겨주게 됐다. 

 

 

1842년 난징조약

 



설상가상 당시 청나라는 최악의 권력자 서태후가 국가 경영을 하면서 권력을 사유화하면서 개혁의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나라의 안위는 그다음이었다. 심지어 서태후는 매우 탐욕적이고 극도로 사치스러웠다. 이는 청나라를 더 쇠락의 길로 이끌었다. 

이는 기원전부터 중국의 문명이 시작된 이후 지속된 왕정 체제를 대신할 서구식 정치 체제 도입의 여론을 크게 했다. 이는 사실상 청나라를 부인하는 일이었고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다. 1905년 러. 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을 그들의 지배권에서 넣으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탈에 나섰다. 청나라 왕조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더 확산했다. 

그 시기 중국에는 청나라를 타도하고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를 기초로 한 공화제와 기존 체제와 절충한 입헌군주제가 대립하고 있었다. 서태후는 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입헌군주제를 선호했고 그에 따른 입헌군주제로의 개헌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08년 명목상의 황제였지만, 서태후의 아들 광서제가 세상을 떠나고 서태후도 세상을 떠나면서 청나라에는 권력 공백 사태가 발생했다. 서태후에 의해 지명된 황제 선통제, 푸이의 나이는 고작 3살에 불과했다. 서태후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았고 자신에 입맛에 맞는 황제를 옹립했다. 푸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가 섭정을 했지만, 무너지는 청나라는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쑨원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수립 


절대 권력이 사라진 청나라 정국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이는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침내 1911년 중국의 정치 지도자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쑨원은 민족, 민권, 민생으로 대표되는 삼민주의를 주창하며 혁명을 이끌었고 많은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에 청 왕조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벌인 위안스카이를 통해 혁명세력을 진압하려 했다. 쑨원의 혁명세력은 1912년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지만, 군사력의 열세를 피할 수 없었다. 위안스카이를 포함한 군벌 세력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을 양보하는 정치적 결단으로 그와 손을 잡았다. 

청나라 왕조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던 위안스카이는 이후 혁명군 편에 섰고 청나라 멸망에 앞장섰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청나라는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청나라 황실은 황제의 직함을 유지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았고 막대한 예산 지원을 받게 됐지만, 권력을 상실했다. 청나라의 멸망과 동시에 중국은 위안스카이를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건국됐다. 이로써 푸이는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얼마 안 돼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황제가 오른 것도 물러나는 것도 그의 뜻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이 시작됐지만, 정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여기에 대총통에 오른 위안 스카이는 권력지향적 인물이었고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중화민국 건국 후 수립된 의회를 무시하고 전횡을 휘둘렀고 심지어 그 스스로가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는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고 각지 군벌들의 반발과 측근들의 이탈로 이어졌다. 위안 스카이는 황제 자리에 오른 지 얼마 후 그 자리에서 물러났고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다. 

 

 

위안 스카이

 




잠깐의 복위와 완전히 사라진 왕위 


다시 발생한 권력 공백 속에 중국은 군벌들이 활개를 치는 분열기로 접어들었다. 이는 군벌 간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 중앙 정치에서는 새로운 실력자 장쉰을 중심으로 푸이를 다시 황제로 옹립하려 하는 복벽운동이 일어났다. 실상은 푸이를 앞세워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1917년 푸이는 다시 황제로 복위했다. 

하지만 쑨원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세력들은 이에 반발했고 군대를 동원해 이에 반발했다. 결국, 자금성이 공화파 군대에 장악되면서 푸이는 복위 12일 만에 다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를 옹립했던 세력들은 모두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졌다. 푸이는 자신의 자금성에 사실상 연금되는 상태가 됐다. 그의 나이 11살 때 일이었다. 

그 나이면 충분히 권력과 정치 등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 속에는 푸이는 언제든 자신이 그 자리에서 내쳐질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푸이는 이 상황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인 가정교사를 통해 국. 내외 정세 등 정보를 얻었고 서구식 공부를 했다. 이를 통해 푸이는 변발을 버리는 등 서구식 생활을 하게 됐다. 각종 의복이나 생활을 변화시켰고 서양의 문화와 스포츠, 취미, 영어를 배웠다.

그는 중국에서 그의 자리는 더 이상 없고 서양 국가들이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그가 황제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생활을 했다. 비록, 명목상 황제였지만, 안락한 삶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청년 푸이

 




정치 격변 속 사라진 안락한 삶 


이런 안락함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계속되는 내전 상황에서 자금성이 있는 베이징에 한 군벌의 반란이 일어났다. 중앙 정부의 권력을 장악한 군벌은 푸이에게 자금성에서 퇴거할 것으로 명령했다. 아울러 황제의 직함마저 완전히 빼앗았다. 푸이는 서양 국가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가졌지만, 변화한 중국의 상황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제 청년이 된 푸이는 1924년 모든 직위와 권위를 잃고 전 황제이자 평민이 되어 자금성을 떠나야 했다.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가득했던 푸이에게 일본이 손을 내밀었다. 중국에 대한 이권 침탈을 넘어 중국 영토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던 일본은 전 황제 푸이가 필요했다. 여전히 상당수 중국인들에게 황제의 권위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특히, 중앙 정치의 영향력이 덜했던 만주지역에서 전 황제 푸이의 존재는 일본의 지역 장악과 통치에 유용할 수 있었다. 일본은 푸이를 극진히 예우했다.

푸이는 일본이 마련해 준 거처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분명 푸이는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나이였고 일본의 숨은 의도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 손을 잡는 일이 자칫 매국의 길이 될 수 있었지만, 푸이의 마음속에서 황제로서 과거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푸이로서는 자신의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 있어 일본을 이용한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도 그렇고 최근의 외교 등에서 볼 수 있듯 외교관계에서 공짜 점심은 없고 자기가 받는 만큼의 대가를 상대에 지불해야 하는 건 피할 수 없다. 푸이의 이런 인식은 국제 정서에 대한 부조한 이해 또는 냉철하지 못한 상황인식이었다. 

실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지역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단행해 그 지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는 국제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당연히 국제사회의 비난이 커졌다. 이에 일본은 만주국 건국을 통해 만주지역 통치의 합법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그런 일본이 내세운 인물이 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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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협력자가 되어 얻은 황제 직위 


푸이는 1932년 만주국의 집정 자리에 올랐다. 최고 권력자였지만, 실권을 일본이 임명한 관리들에 있었다. 국제 연맹은 이런 만주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괴뢰국으로 규정했다. 이에 일본은 강하게 반발했고 국제 연명에서 탈퇴했다. 이는 국제질서에 반하는 전쟁국가가 되는 것을 선언한 것으로 다름없었다. 

만주국은 전쟁국가가 된 일본의 대륙 침략 전진기지가 됐다. 만주 일대의 막대한 자원이 수탈됐다. 심지어 전쟁 준비와 통치 자금 마련을 위해 마약의 유통 판매하기도 했다.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시 내각의 총리를 역임한 대표적 전범으로 사형에 처해졌던 기시 노부스케와 또 한 명의 대표적 전범으로 전후 사면되어 일본 총리에도 올랐던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 등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만주국에 대한 지배를 더 공고히 했다. 

그 사이 만주국은 겉보기에는 매우 근대적이고 산업화가 활발히 진행되는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푸이는 집정관을 넘어 1934년 만주국 황제에 올라 자신의 꿈이었던 청나라의 부활에 근접하는 듯했다. 하지만 만주국은 앞서 언급한 대로 전쟁을 위한 전진기지였고 보급기지였다. 푸이는 전쟁국가 일본에 부역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푸이는 황제에 오른 후 일제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일본을 방문해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지금도 일제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도 했다. 또한, 중. 일 전쟁이 한창인 1940년에는 만주국에 야스쿠니 신사와 유사한 건국충령묘를 만들어 스스로 참배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황제였던 그가 본격적인 매국의 길을 걷는 일이었다. 대신 그는 안락한 삶을 보장받았다. 

그가 진정으로 나라와 그의 국민들을 위하는 인물이었다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권력의 달콤함을 쉽게 버리지 못했고 권력자의 의무와 권력이 가지는 무게에는 눈을 감았다. 이는 부역 행위는 그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으로 처벌을 받는 이유가 됐다. 

만주국은 일제 침략의 전진기지일 뿐만 아니라 반 인륜적인 전쟁범죄였던 생체 실험이 자행됐던 731부대가 운영되기도 했다. 또한 만주국은 일제에 저항하는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푸이는 그런 전쟁범죄의 공조자이거나 방관자였다. 

 

 

만주국 영역

 




일제의 패망과 완전한 몰락


결국, 만주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소련군의 만주 공격과 일본의 패망으로 멸망했다. 푸이 역시 소련군을 피해 탈출을 시도했지만, 소련군에 체포되는 신세가 됐다. 푸이는 1946년 도교 전범재판에 출석해 나름 일제의 전쟁 범죄를 비판하고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식의 항변을 했지만, 만주국의 황제였던 그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푸이는 이후 소련군에 의해 1950년 공산화된 중국으로 송환됐다. 푸이는 중국행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소용이 업었다. 푸이는 중국으로 송환된 이후 전범으로 긴 세월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1959년 그는 특별 사면 대상자가 되어 수용소를 나올 수 있었고 세상과 만날 수 있다. 대신 그는 황제가 아닌 평범한 시민으로 세상과 마주했다. 그는 정원사로 여생을 보냈고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7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삶 자체가 드라마와 같았던 삶이었다.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황제라는 사실 자체로도 그의 삶은 극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중. 일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풍파를 겪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푸이는 자신의 안위와 권력에만 집착했다. 일제에 이용당했다고 하지만, 침략을 위해 만든 괴뢰국 만주국의 황제가 됐다는 사실은 씻을 수 없는 인생의 오점이었다. 그는 자서전 등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불가피성을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가 권력의 부활을 꿈꾸는 사이 수많은 중국인들이 일제에 의해 희생됐고 나라가 파괴됐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변명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의 변명과도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만약, 푸이가 마지막 황제로서 침략자에 당당히 맞서고 항전을 독려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면 그는 보다 존경받는 인물로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푸이는 그 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개인적으로 불행했다 할 수도 있지만, 불가피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삶은 아니었다. 푸이의 삶은 그 점에서 일제 강점기 엇갈린 선택을 했던 독립운동가들과 친일파들의 삶을 다시 살펴보고 싶게 한다. 또한, 사회 지도층들이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사진 : 프로그램 / 위키트리,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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