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다룬 역사 드라마 징비록이 시작됐다. 징비록 1, 2회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정치 상황과 일본의 상황이 함께 그려졌다. 당시 조선은 선조 즉위 이후 가시화된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립 속에 동인 정권이 주요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징비록의 저자이자 주인공 류성룡은 선조의 두터운 신임 속에 조정의 요직에 있으면서 집권세력인 동인의 중심인물이었다.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직계 혈족이 아닌 방계 혈족으로 임금에 올라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왕권은 미약했다. 하지만, 선조는 명나라로부터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공인 받으면서 왕권에 확립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선조는 당시 동인에 밀려 권력에서 멀어진 서인을 이용해 비대해진 동인 세력을 숙청했다.서인은 동인 계열의 정여립이..
이제는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팝아트, 그 장르의 거장이 우리나라에서 특별전을 열고 있습니다. 브라진 태생의 팝아트 작가 로메로 브리토전이 그것인데요.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우리나라만을 위한 전시 콘셉으로 특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메로 브리토는 작품 세계는 강렬하면서 친근하고 창의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소재들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또한 어린 나이에 그 능력을 인정받는 천재형 예술기이기도 합니다. 유명해진 이후 로메로 브리토는 사회참여와 함께 공익적인 메시지를 작품에 녹여내기도 했고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지금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카메라 없이 용산역 아이파크몰을 찾았다가 전시회를 찾았습니다. 다른 전시회와 달리 작품들에 대해 마음껏 사진으..
수많은 이들을 설레게 했던 드라마 도깨비가 막을 내렸다. 결말은 시청자 다수의 바람대로 모든 주인공들의 행복한 결말이었다. 물론, 영생의 삶을 살고있는 도깨비와 인간에게 주어지는 4번의 삶 중 2번째 삶을 살게 된 그의 도깨비 신부와 또 다시 아픈 이별을 해야하는 운명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사랑이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사람들을 가지면서 결말을 지켜봤다. 도깨비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사랑은 거의 1,000천년의 세월을 초월하고 있다. 주인공 김신은 고려시대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장군으로 그의 여동생은 황태후의 자리에 있었다. 당연히 권력에서 그는 최정점에 있는 인물이었고 그에 비례해 그를 견제하고 시기하는 이들도 많았다. 박중원을 중심으로 한 간신 세력은 황제 ..
드라마 임진왜란 1592, 5회는 임진왜란이 후반부를 다루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조선은 나라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몰렸다. 왕을 비롯한 집권층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북으로 피난 가기에 급급했다. 왕은 명나라 망명을 고려하기에 이르렀고 백성들은 침략군의 약탈과 노략질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됐다. 조선에서의 손쉬운 승리에 일본은 기세를 몰아 조선을 넘어 명나라로의 진격을 현실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생각지 않았던 변수가 등장했다. 우선 바다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며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육지에서는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이 그들을 괴롭혔다. 조선의 북쪽 깊숙이 진격한 일본군은 군수물자 부족은 물론이고 식량난에 시달리며 사..
지난 1, 2, 3회를 통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함께하는 팩츄얼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로 임진왜란을 조명했던 드라마 임진왜란 1592, 그 네 번째 이야기는 명나라의 참전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전쟁 전 명나라를 비롯한 조선, 일본의 상황과 전쟁 후 명나라의 참전 과정, 명나라군이 참여했던 대표적 전투인 평양성 전투가 주 내용이었다. 그 속에서 명나라의 참전 배경과 한.중.일의 역학관계가 함께 조명됐다. 임진왜란 발발의 주요 원인은 알려진 대로 일본을 통일한 실력자 토요토미의 야욕이었다. 도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하긴 했지만, 여전히 지방의 실력자들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힘으로 누를 수 없었던 상황에서 토요토미는 일본을 벗어나 외부로 눈을 돌렸다. 도요토미는 집권 이..
세종의 수레가 부서지는 사고는 역모죄로 비화했다. 수레 제작을 주도한 장영실은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모든 정황은 그가 누명을 쓴 것이 분명했지만, 그에 앙심을 품고 있던 사대부들의 탄핵여론은 세종은 강하게 압박했다. 세종과 그를 따르는 일부 사대부들이 장영실의 구명을 위해 고심했지만, 장영실은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죽음을 택했다. 누구보다 장영실의 진심을 잘 아는 세종은 장영실을 버릴 수 없었다. 장영실은 백성들을 삶을 이롭게 하려는 세종의 정치 철학을 상징하는 어쩌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자를 반포하고 격물 진흥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사대부 세력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이런 세종에 사대부 세력은 장영실이 업적을 담은 역사기록까지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