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수레가 부서지는 사고는 역모죄로 비화했다. 수레 제작을 주도한 장영실은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모든 정황은 그가 누명을 쓴 것이 분명했지만, 그에 앙심을 품고 있던 사대부들의 탄핵여론은 세종은 강하게 압박했다. 세종과 그를 따르는 일부 사대부들이 장영실의 구명을 위해 고심했지만, 장영실은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죽음을 택했다. 누구보다 장영실의 진심을 잘 아는 세종은 장영실을 버릴 수 없었다. 장영실은 백성들을 삶을 이롭게 하려는 세종의 정치 철학을 상징하는 어쩌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자를 반포하고 격물 진흥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사대부 세력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이런 세종에 사대부 세력은 장영실이 업적을 담은 역사기록까지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정치..
세종과 장영실이 주도하는 격물 진흥 정책의 성과는 눈부셨다. 조선은 더는 명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천문 연구가 가능해졌고 다양한 발명품들은 백성들의 삶을 더 풍요롭 게 하는데 이용됐다. 특히,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의 보급은 상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이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격물 연구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기득권 세력인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는 커져만 갔다. 세종을 중심으로 한 열린 사대부 세력들이 격물 진흥 정책을 뒷받침했지만, 대다수 사대부들에게 격물진흥은 체제를 위협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흔들게 하는 일로 여겨졌다. 실제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진다면 이와 비례해 지식의 습득이 보다 쉬워질 수 있고 이는 사대부들이 독점..
격물 진흥 정책을 위해 던진 세종의 승부수가 적중했다. 세종이 공언한 대로 장영실과 서운관 관리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일식의 일지와 일시는 정확히 예보했다. 세종은 역대 가장 정확한 시간에 구식례를 거행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격물진흥 정책에 대한 조정의 반대 여론은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추가적인 격물 진흥 정책도 탄력을 받게 됐다. 이 과정에 큰 위기가 있었다. 누적된 기록 부족으로 고심하던 장영실과 학자들은 일식 일자는 예보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일시는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이들은 과거 조선 비밀 천문연구과정에서 작성된 기록을 떠올렸다. 그 기록은 당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장희제에 의해 보관되어 있었다. 장희제는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그 기록을 가지고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
과거와 현실이 무전기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독특한 소재와 더불어 마지막까지 결말에 대한 시청자들의 추측과 의견들이 분분했던 드라마 시그널이 16부로 여정을 마쳤다. 주인공 살리기 청원까지 불러일으켰던 드라마는 앞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질 여지를 남긴 열린 결말로 마감됐다. 드라마의 중심축을 이루는 사건이었던 인주시 집단 성폭행 사건은 박해영의 형에게 씌워진 누명이 벗겨졌고 사건 조작을 주도했던 김범주 국장은 단죄됐다. 드라마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던 유괴사건은 과거에서 이미 범인이 체포돼 미제 사건으로 남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주인공 이재한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이재한은 15년 후 미래에서 온 무전을 통해 위험을 사전에 감지했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김범주 국장의 함정에서 벗어..
자칫 장희제에 의해 불태워질 위기에 처했던 장영실의 새로운 물시계는 마지막 순간 장희제의 양심이 발동하며 극적으로 보존됐다. 장희제는 자신을 몰래 미행해왔던 김학주에 위해를 가하면서까지 물시계를 지켜냈다. 장희제 역시 장영실 물시계의 독창성과 그 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물 진흥이라는 대의를 장희제는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장희제는 함께 물시계 제작과 천문 연구를 하고자 내민 장영실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장희제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물을 그대로 두고 칩거에 들어갔다. 위기를 벗어난 장영실의 물시계는 마침내 세종과 대신들에 공개됐다. 그의 혁신적인 기술에 세종은 물론이고 여타 대신들도 찬사를 보냈다. 이는 그동안 격물 연구에 반대하던 대신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로서도 조선의 표준시간을 알려..
조선 천문 프로젝트가 정치적 문제로 좌절된 이후 은둔의 삶을 살았던 장영실이 다시 돌아왔다. 당연히 그를 시기하고 제거하려 했던 대신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편경 제작에 중요한 역할을 한 그의 관직 재 등용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리학을 숭상하는 조선에 있어 아악은 성리학적 이념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문제는 아악을 구성하는데 있어 음의 표준이 되는 편경이 음 구현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는 아악의 근본을 흔드는 것으로 조선왕실에는 큰 근심이었다. 각 분야에서 나라의 표준을 만드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었던 세종에도 이는 중요한 문제였다. 세종은 아악의 책임자 박연으로 하여금 정확한 음을 구현하는 편경 제작을 하도록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