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30여 년간의 고려 거란 전쟁 기간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5회부터 본격적으로 2차 고려 거란 전쟁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강조의 정변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고 현종의 즉위가 있었다. 고려 현종은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유년기부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며 큰 시련을 겪어야 했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현종은 왕위 계승에 있어 우선 순위에 있었지만,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됐고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서야 했다.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나 왕실 내 우호세력이 없었던 상황에서 승려가 되기도 했고 계속된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왕위에 오른 것도 선왕이 시해당하는 정변의 결과였..
고려와 거란 전쟁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이제 제2차 여요 전쟁, 고려 거란 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1010년 10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고려는 서북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당시 왕이었던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을 하는 등 치명적인 피해를 당했다. 고려 역사에서는 아픈 순간이었지만, 이 전쟁은 결코 패배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런 판단의 배경에는 양규라는 인물이 있었다. 양규는 2차 고려 거란 전쟁이 발발하기 전 고려 목종 집권기 형부낭중, 법을 집행하는 기관의 관리였다. 이에 그가 무관이 아닌 문관 출신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한다. 그가 고려사에서 한층 비중 있게 등장하는 건 강조의 정변 이후 권력 구도가 ..
우리 역사의 중심은 각 시대 왕들이다. 과거부터 전해지는 역사서는 왕의 연대기를 중심으로 기술되는 게 보통이고 각 그 시기 집권층들이 역사와 관련 기록 편찬을 주도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이는 역사를 남성들의 역사로 기술하게 했다. 인류 역사에서 남성 중심으로 가부장적 사회 질서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고 고대부터 국가 권력구조 역시 그 흐름이 이어졌다. 각 왕조의 왕은 남성들이 승계하는 구조였다. 왕조 계승의 원칙은 부자간 세습, 더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에서 장남으로 세습이 원칙이었다. 물론,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집권층 내 권력 투쟁의 결과로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형제 세습이 이루어지거나 형제간 권력 투쟁으로 장자 상속의 원칙이 깨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중요한 건 여성들은 권력에..
고려 초기 역사는 대외적으로 거란과의 치열한 대결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간 중요한 장면이 있었다. 1009년 일어난 강조의 정변은 고려 역사상 최초로 왕이 신하에게 폐위되고 시해당하는 사건이었다. 후사가 없었던 목종의 죽음은 고려 태조 왕건의 직계 자손들의 왕위 계승이 단절된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건은 발단은 목종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에 있었다. 대중들에게 고려 목종이 무능력하고 어머니 천추태후와 그의 내연남 김치양에 휘둘려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왕으로 알려져 있고 고려사를 배경으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목종은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그의 동성애적 성향이 더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목종의 치세 기간 고려는 거란, 송나라와 실리 외교를 펼치며 전쟁을 방지했고 북방의 군사력을 ..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시기는 삼국시대 그중 고구려의 역사다. 지금은 우리 영토가 아닌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여러 북방 민족과의 대결과 전쟁을 통해 나라의 영역을 넓혔고 만주 일대를 장악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이에 그치지 않고 수나라와 당나라까지 강력한 중국 통일 왕조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주성을 잃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강국의 입지를 단단히 했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자주적이 외교와 활발한 대외 교류를 했고 주변 북방 민족들을 아우르는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668년 나. 당 연합군에 멸망한 이후 만주 지역은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