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728x170
프로야구 시범경기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이상열기라고 해도 될만큼 많은 관중들이 야구장을 찾아 자신의 팀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프로야구 흥행의 성공은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것은 해외파 선수들의 국내 복귀를 들 수 있습니다. 박찬호를 비롯해서 이승엽, 김병현, 김태균 등의 대형 선수들의 존재가 프로야구 열기 조기 점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들 중 이승엽은 자신의 최고전성기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동시에 보낸 선수입니다. 한국 리그의 성공이 해외 무대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예시였습니다. 그만큼 이승엽은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국내무대에서 이승엽은 홈런왕의 계보를 잇는 타자였고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였습니다. 그에게 라이언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것 역시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승엽의 전성기 성적은 압도적이었습니다. 1995년 프로무대 타석에 들어선 이승엽은 홈런왕과 타점왕을 5차례씩 수상한 슬러거의 전형이었습니다. 여기에 꾸준히 3할 타율을 유지하는 정교함까지 갖춘 선수였습니다. 큰 경기에서의 해결능력은 중심타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승엽이 타선을 이끈 삼성은 한국시리즈 우승의 숙원을 풀 수 있었습니다. 삼성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의 등장은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도 큰 플러스 요인이었습니다. 그가 2003년 시즌 56개의 홈런으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울때에는 전국민적인 관심이 그에게 쏠릴 정도였습니다. 삼성의 이승엽이 아니라 이승엽의 삼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당시의 분위기였습니다.
이승엽의 존재감은 국제 경기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예선에서 부진하더라도 중요한 경기에서의 결정적 한 방은 국가대표 4번타자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해주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 ,4위전에서의 결정적 2루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일본과의 준결승과 쿠바와의 결승에서 터뜨린 홈런은 그를 국민타자로 불리우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렇게 이승엽의 존재는 우리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승엽은 국내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무대로의 도전을 전성기 시절 결정했습니다. 현미경 분석 야구를 펼치는 일본에서 타자의 성공은 쉽지 않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은 일본행을 선택했습니다. 적응 첫 해 부진을 이겨낸 이승엽은 이후 일본를 대표하는 장거리 타자로 다시 한번 자리했습니다.
특히 일본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 4번타자로서 활약하던 시절은 그의 야구인생에 가장 빛나는 황금기였습니다. 영원할것 같았던 이승엽의 전성기는 너무 쉽게 사라졌습니다. 요미우리와 대형 계약을 체결한 다음 시즌부터 이승엽은 급격한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상과 상대의 집요한 견제에 이승엽은 타격감을 잃었고 좀처럼 전성기의 기량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진은 그가 외국인 선수라는 현실을 더욱 더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일본 최고의 부자구단 요미우리는 그의 부활을 기다리기 보다는 또다른 거물 선수를 영입하면서 이승엽을 벼랑끝으로 몰고갔습니다. 요미우리를 대표하던 이승엽은 기회상실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계속된 부진은 그에게 '먹튀'라는 좋지 못한 평가까지 듣게 만들었습니다.
'국민타자', '라이언킹'이라는 수식어는 국내에서도 점점 퇴색되어 같습니다. 출전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이승엽에게 팬들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대형 계약이후의 부진은 그에 대한 좋았던 평가를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이렇게 그의 일본무대 진출이 마감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승엽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시즌 오릭스에서 이승엽은 2할대 초반의 저조한 타율을 기록했지만 20개를 넘기는 홈런을 기록하면서 녹슬지 않는 장타력을 선보였습니다. 일본의 극심한 투고타저 현상 속에 그의 기록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부활의 가능성도 보였습니다. 또 한번 일본무대에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명예회복을 하고 일본무대를 떠나겠다는 목표가 다시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 무대를 명예회복의 장소로 선택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연봉을 감수하면서 그는 삼성으로 복귀했습니다. 자칫 부진한 성적을 기록한다면 국내 무대에서 쌓아올린 그의 기록마저 빛바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승엽은 국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찾으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자신이 성장하고 성공시대를 연 한국무대에서 보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바램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모릅니다. 일본에서 최고 타자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였지만 그가 없는 사이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은 크게 발전했습니다. 투수들의 수준 또한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승엽으로서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이 필요합니다. 이미 30대 후반으로 접어든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동계훈련기간 이승엽은 연습경기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타격감이 올라올 시기는 아니었지만 좋았던 타격폼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유망주들이 다소 포진된 삼성의 라인업에서 이승엽의 존재감은 그들의 입지를 크게 좁게 만들었습니다.
이승엽의 경험과 노하우가 팀 선수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성적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그 효과는 반감될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전성기를 지난 그였지만 성적으로 그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필요한 올 시즌입니다. 부진이 거듭된다면 그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마저 싸싸늘해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승엽은 부담을 가지고 시즌을 준비하는 상황입니다. 연습경기의 부진은 그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승엽은 시범경기에서 거포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과시했습니다. 첫 경기에서 이승엽은 시원한 홈런으로 그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잠실구장에서의 홈런이라 그 의미가 더 컸습니다.
이승엽은 다음 경기에서도 안타를 기록하면서 타격감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국내에서 활동할 때에도 이승엽은 날이 더워지면서 폭발하는 슬로우스타터였습니다. 이승엽은 시범경기에서 점점 컨디션이 올라오고 있음을 보여주고있습니다. 팬들이 그에게 가지고 있었던 걱정과 의문을 호쾌한 타격으로 날린 것입니다.
아직 시범경기지만 왕의 귀환은 일단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전성기의 기량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리그 적응을 순조롭게 할 수 있다면 삼성 타선의 순도를 훨씬 더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타팀에게 삼성이 더욱 더 까다로운 상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범경기 첫 홈런은 이승엽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이승엽이 전국민에게 신드롬을 안겨주었던 국민 4번타자로 돌아올 수 있을지, 라이언킹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미 우리 프로야구의 레전드 자리를 예약한 베테랑의 활약은 시범경기에서부터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사진 : 삼성라이온즈 홈페이지
이들 중 이승엽은 자신의 최고전성기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동시에 보낸 선수입니다. 한국 리그의 성공이 해외 무대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예시였습니다. 그만큼 이승엽은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국내무대에서 이승엽은 홈런왕의 계보를 잇는 타자였고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였습니다. 그에게 라이언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것 역시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승엽의 전성기 성적은 압도적이었습니다. 1995년 프로무대 타석에 들어선 이승엽은 홈런왕과 타점왕을 5차례씩 수상한 슬러거의 전형이었습니다. 여기에 꾸준히 3할 타율을 유지하는 정교함까지 갖춘 선수였습니다. 큰 경기에서의 해결능력은 중심타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승엽이 타선을 이끈 삼성은 한국시리즈 우승의 숙원을 풀 수 있었습니다. 삼성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의 등장은 마케팅적인 측면에서도 큰 플러스 요인이었습니다. 그가 2003년 시즌 56개의 홈런으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울때에는 전국민적인 관심이 그에게 쏠릴 정도였습니다. 삼성의 이승엽이 아니라 이승엽의 삼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당시의 분위기였습니다.
이승엽의 존재감은 국제 경기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예선에서 부진하더라도 중요한 경기에서의 결정적 한 방은 국가대표 4번타자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해주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 ,4위전에서의 결정적 2루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일본과의 준결승과 쿠바와의 결승에서 터뜨린 홈런은 그를 국민타자로 불리우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렇게 이승엽의 존재는 우리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승엽은 국내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무대로의 도전을 전성기 시절 결정했습니다. 현미경 분석 야구를 펼치는 일본에서 타자의 성공은 쉽지 않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은 일본행을 선택했습니다. 적응 첫 해 부진을 이겨낸 이승엽은 이후 일본를 대표하는 장거리 타자로 다시 한번 자리했습니다.
특히 일본 최고의 명문 요미우리 4번타자로서 활약하던 시절은 그의 야구인생에 가장 빛나는 황금기였습니다. 영원할것 같았던 이승엽의 전성기는 너무 쉽게 사라졌습니다. 요미우리와 대형 계약을 체결한 다음 시즌부터 이승엽은 급격한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상과 상대의 집요한 견제에 이승엽은 타격감을 잃었고 좀처럼 전성기의 기량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진은 그가 외국인 선수라는 현실을 더욱 더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일본 최고의 부자구단 요미우리는 그의 부활을 기다리기 보다는 또다른 거물 선수를 영입하면서 이승엽을 벼랑끝으로 몰고갔습니다. 요미우리를 대표하던 이승엽은 기회상실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계속된 부진은 그에게 '먹튀'라는 좋지 못한 평가까지 듣게 만들었습니다.
'국민타자', '라이언킹'이라는 수식어는 국내에서도 점점 퇴색되어 같습니다. 출전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이승엽에게 팬들의 관심은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대형 계약이후의 부진은 그에 대한 좋았던 평가를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이렇게 그의 일본무대 진출이 마감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승엽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시즌 오릭스에서 이승엽은 2할대 초반의 저조한 타율을 기록했지만 20개를 넘기는 홈런을 기록하면서 녹슬지 않는 장타력을 선보였습니다. 일본의 극심한 투고타저 현상 속에 그의 기록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부활의 가능성도 보였습니다. 또 한번 일본무대에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명예회복을 하고 일본무대를 떠나겠다는 목표가 다시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 무대를 명예회복의 장소로 선택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연봉을 감수하면서 그는 삼성으로 복귀했습니다. 자칫 부진한 성적을 기록한다면 국내 무대에서 쌓아올린 그의 기록마저 빛바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승엽은 국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찾으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자신이 성장하고 성공시대를 연 한국무대에서 보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바램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모릅니다. 일본에서 최고 타자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였지만 그가 없는 사이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은 크게 발전했습니다. 투수들의 수준 또한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승엽으로서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이 필요합니다. 이미 30대 후반으로 접어든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동계훈련기간 이승엽은 연습경기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타격감이 올라올 시기는 아니었지만 좋았던 타격폼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유망주들이 다소 포진된 삼성의 라인업에서 이승엽의 존재감은 그들의 입지를 크게 좁게 만들었습니다.
이승엽의 경험과 노하우가 팀 선수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성적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그 효과는 반감될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전성기를 지난 그였지만 성적으로 그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필요한 올 시즌입니다. 부진이 거듭된다면 그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마저 싸싸늘해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승엽은 부담을 가지고 시즌을 준비하는 상황입니다. 연습경기의 부진은 그에게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승엽은 시범경기에서 거포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과시했습니다. 첫 경기에서 이승엽은 시원한 홈런으로 그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넓은 잠실구장에서의 홈런이라 그 의미가 더 컸습니다.
이승엽은 다음 경기에서도 안타를 기록하면서 타격감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국내에서 활동할 때에도 이승엽은 날이 더워지면서 폭발하는 슬로우스타터였습니다. 이승엽은 시범경기에서 점점 컨디션이 올라오고 있음을 보여주고있습니다. 팬들이 그에게 가지고 있었던 걱정과 의문을 호쾌한 타격으로 날린 것입니다.
아직 시범경기지만 왕의 귀환은 일단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전성기의 기량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리그 적응을 순조롭게 할 수 있다면 삼성 타선의 순도를 훨씬 더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타팀에게 삼성이 더욱 더 까다로운 상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범경기 첫 홈런은 이승엽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이승엽이 전국민에게 신드롬을 안겨주었던 국민 4번타자로 돌아올 수 있을지, 라이언킹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이미 우리 프로야구의 레전드 자리를 예약한 베테랑의 활약은 시범경기에서부터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사진 : 삼성라이온즈 홈페이지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스포츠 > 야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SK 임경완 제 2의 야구인생 활짝 꽃피울 수 있을까? (0) | 2012.03.24 |
---|---|
넥센의 젊은 중심타선 팀 상위권 도약 이끌까? (6) | 2012.03.23 |
삼성 최형우 최고 타자의 자리 지켜낼까? (2) | 2012.03.16 |
국제전으로 전개될 프로야구 마무리 투수 대결 (2) | 2012.03.14 |
마무리 투수 리즈, LG의 묘수? 자충수? (1) | 2012.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