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계에 큰 비보가 전해졌다. 한 때 우리 프로야구를 이끌어갈 투수로 주목받았던 조성민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비시즌 기간 야구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조성민은 야구선수보다는 고인이 된 유명배우 최진실의 배우자가 더 알려졌었다. 그는 야구계 소식보다는 연예계 소식에 더 이름을 올려야 했다. 조성민은 야구계의 주변을 맴돌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다.
조성민은 고교, 대학시절 임선동, 박찬호 등과 더불어 최고 유망주 투수였다. 당장 프로에 들어와도 에이스로 활약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92학번 트리오의 한 명으로 프로팀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되기도 했다. 출중한 기량에 훤칠한 외모까지 갖춘 조성민은 대형 선수로 성장할 가능성을 고교 시절부터 보여주었다. 조성민에 대한 관심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리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성민은 우리 프로팀들의 끈질긴 입단 경쟁을 뿌리치고 일본리그 직행을 선택했다. 박찬호는 미국에서 조성민의 일본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투수가 되었다. 일본 최고 명문 요미우리에 입단한 조성민은 신인답지 않은 담대함과 함께 빼어난 구위로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그의 야구 인생도 일본에서 활짝 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부상은 더 높은 도약을 꿈꾸던 젊은 선수의 날개를 꺽고 말았다. 조성민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장기간 재활에 힘써야 했다. 그 재활 기간이 예상과 달리 길어졌다. 필요한 선수를 돈으로 사는데 익숙한 요미우리는 젊은 외국인 투수의 회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기약 없는 재활에 조성민은 지치고 말았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은 일찍 끝나고 말았다.
그러던 그에게 다시 최고 여배우 최진실과의 만남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당시 조성민과 최진실의 만남과 결혼은 아무도 예상 못 한 소식이었다.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조성민은 야구를 떠나 개인사업을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모색했다. 이렇게 조성민은 야구와 멀어졌다.
스포츠스타와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여배우의 부부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둘 사이게 불화설이 터져 나왔고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조성민은 연예계 뉴스에 자주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이했다. 이는 두 사람 모두에 큰 상처가 되었다. 이렇게 두 사람을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고 조성민 역시 야구인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다.
이후 조성민은 한 때 야구해설가로 데뷔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또 다른 삶은 잘 살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야구계에 다시 발은 들여놓은 조성민은 다시 한 번 선수생활에 대한 열정을 되살렸다. 긴 공백이 있었지만, 조성민은 선수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싶었다. 그런 조성민에 한화가 손을 내밀었다.
조성민은 2005년부터 2007년 까지 3년간 한화의 투수로 활약했다. 그의 선수 복귀는 야구계를 흥분시키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의 투구에 관심도 높았다. 하지만 오랜 공백을 극복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의 몸은 그의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조성민은 재기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3시즌을 뛰면서 3승 4패, 방어율 5.09의 성적을 남기고 조용히 선수생활을 접고 말았다. 선수로서 살아있음을 보이려 했던 조성민의 희망은 이렇게 무너졌다.
이런 조성민에게 전 부인이었던 최진실의 사망소식은 그를 뜻하지 않은 뉴스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당시 드러난 친권자 문제는 최진실법을 만들게 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조성민은 여론의 좋지 못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그는 먼 발치에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가는 전 부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조성민에 두고두고 무거운 짐이 되었다. 조성민에게는 야구인 조성민이 아닌, 고인이 된 최진실의 전남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했다. 이는 조성민이 또 다른 인생을 설계하는 있어 이를 막는 굴레였다. 이후 조성민은 두산에서 코치생활을 하기도 했고 모교에서 인스트럭터로 일하면서 지도자로서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최근에는 폭행사건에 연루되는 등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사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겨울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조성민은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고교시설부터 화려하게 야구인생을 열었던 조성민이었지만,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말았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스타로서 감당해야 할 힘겨운 삶, 그 안에 감쳐진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렇게 조성민은 그의 삶을 너무나 허무하게 접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야구계의 입장에서 조성민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짧지만 강렬했던 선수로 사는 삶을 기억하는 야구팬들은 여전히 많다. 조성민만큼 많은 이들이 기대를 하게 했던 대형 선수도 드물었다.
하지만 조성민은 이제 비운의 스타로만 기억될 뿐이다. 야구로 세상에 처음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 야구인으로 생을 마감하지 못하는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중요한 건 조성민은 야구인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족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다시는 조성민과 같은 안타까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사진 : 한화 이글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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