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계약과 트레이드 등 내년 시즌을 준비하는 구단들의 지략 대결이 이어지는 프로야구 스토브리그에서 선수협 관련한 문제가 이슈로 등장했다. 선수협 회장의 판공비와 관련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선수협 이대호 회장이 기자회견을 자처해 이를 해명하고 사과하는 일이 생겼다. 요지는 선수협 회장의 활동비라 할 수 있는 판공비를 2배 인상하는 과정이 석연치 않았고 사용과 관련한 투명성이 떨어지면서 개인 용도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었다.
이에 대해 선수협은 선수협 회장 자리를 꺼리는 분위기 속에서 떠밀려 회장 역할을 하는 선수를 위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필요하고 활동비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해명을 했다. 또한, 판공비는 대부분 선수협 회장으로서 필요한 부분에 사용했고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여론의 흐름은 여전히 싸늘하다. 그 비난은 이대호 회장에게 집중됐다.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가 고액의 판공비가 필요했는지에 대해 비난 여론이 크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선수협에 대한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선수협은 우리 프로야구 선수들을 대표하고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복지를 증진하고 KBO 및 관련 단체들과의 소통과 협력으로 프로야구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선수협 홈페이지에도 명시되어 있다. 판공비 관련 파동은 선수협이 그들의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정적 인식이 폭발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선수협은 프로야구 전체 선수들을 대표하는지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선수협 구성원들은 대부분 고액 연봉자로 채워져 있고 그들만의 리그였다. 선수협이라는 버팀목이 절실히 필요한 저 연차, 저 연봉 선수들에게 선수협은 멀어 보였다. 선수협은 선수들의 연봉에서 일정 금액을 회비로 받고 있다. 선수협 자체 사업을 통해 수익도 창출하고 있다. 단순한 친목단체 이상의 존재다. 억대 연봉 선수들 외에 대다수 선수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았는지에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이번 판공비 사건은 선수협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그 저변에 깔려있다.
물론, 선수협의 한계점도 있다. 선수협은 온전한 선수 노조가 아니다. 단체 교섭권과 단결권 등이 없다. KBO 리그와 협의를 한다고 하지만, 선수협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기는 어려운 구조다. 분명 태생적 한계가 있다. 조직을 이끌어갈 전문성도 부족하다. 사무총장이 있지만, 사무총장과 관련한 비위 문제로 홍역을 치른 경험도 있다. 선수들이 선출한 회장 역시 온전히 그 역할에 집중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서로가 회장이 되길 꺼려 하는 분위기가 크다. 임기를 마무리하는 이대호 역시 선수들의 투표를 거치긴 했지만, 모두가 고사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고액 연봉자들을 임의로 후보를 정한 투표로 선출됐다. 회장에 대한 의지와 선수협을 이끌어갈 청사진이나 비전을 가지고 역할을 했다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역할의 한계성과 지도부의 의지가 크지 않은 선수협이 프로야구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대호 회장이 판공비 인상과 관련하여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항변을 한 것도 일견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대호 회장 기간 선수협은 FA 상한제, 총 연봉 샐러리캡, 부상자 명단 제도 도입과 육성형 외국인 선수제 도입, FA 선수 등급제 제도 개선 과정에서 나름 의견을 제시하는 모습도 보였다. 선수협의 존재는 지지부진하던 제도 개선을 이끈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선수들의 권익과 복지증진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에 있어서는 선수협의 역할에 아쉬움이 있다. 최저연봉 인상이나 선수들의 이동을 보다 자유롭게 하는 제도 개선을 위한 선수협의 존재감이 부족했다. 이는 선수협의 고액 연봉자들을 위한 단체라는 인식을 강하게 했다. 이는 선수협의 존재 이유마저 흔들리게 할 수 있다.
선수협은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선수협은 1988년 당시 프로야구 최고 슈퍼스타였던 고 최동원이 주동이 되어 선수노조 설립을 위한 노력을 그 시초로 하고 있다. 하지만 선수노조를 목적으로 했던 선수협은 고액 선수들의 노조라는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있었고 이에 대한 여론전이 미숙했다. 법적인 부분도 선수협을 설립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노조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구단들의 강경 대응 등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당시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사회적 분위기 추진됐던 선수협 설립은 희지 부지되고 말았다. 이를 주도했던 최동원은 이후 보복성 트레이드로 롯데에서 삼성으로 이적했고 얼마 안 가 쓸쓸히 은퇴해야 했다.
이후 선수협은 2000년대 들어 각 구단의 주축 선수들이 주도하여 설립을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하지만 KBO와 구단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KBO는 설립을 주도한 선수들을 제명하는 등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구단들 역시 힘으로 선수협 설립을 막았다. 선수협 내부적인 갈등도 있었다. 이번에도 선수협이 무산될 위기였지만 선수들의 단체행동 가능성까지 대두되는 등 선수들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당시 주무부처인 문체부의 중재로 지금의 선수협이 설립될 수 있었다. 선수들이 원하는 선수노조는 아니었지만, 선수들을 대표하는 단체의 설립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이번에도 선수협을 주도했던 선수들 상당수는 보복성 트레이드 대상이 되며 팀을 떠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렇게 선구자적 역할을 한 선수들의 희생과 힘든 과정을 거쳐 설립된 선수협이었지만, 설립 후 선수들을 위한 단체로 발전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부 비리로 운영의 난맥상을 노출하기도 했고 선수협 회장들 역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사이 선수협 회장은 부담스러운 자리가 됐다. 지도부가 흔들리는 선수협이 제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제는 판공비 문제로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다. 선수협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우선 이대호 이후 새로운 회장을 선임해야 한다. 하지만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질 선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선수협 회장 자격에 제한을 두기보다 의지와 비전이 있는 인물이 나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현역 선수가 아닌 은퇴선수에게도 문호를 여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운영과 관련한 감시감독 기능도 강화하고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여기에 팬들에게 더 다가서도 팬들의 지지를 얻는 운영의 묘도 있어야 한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단순한 침목 단체로 그 역할을 한정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는 것에서 벗어난 보다 전향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멀어진 팬과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대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는 리그 현실에서 선수협 활동은 구단들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KBO 역시 다르지 않다. 코로나 사태로 구단들의 재정적 압박이 더 커진 상황에서 선수협의 입지는 훨씬 더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협으로서는 팬들의 지지를 얻고 이를 여론의 지지로 연결하는 노력이 더 절실하다. 또한, 선수들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들을 수 있는 소통의 통로가 항시 있어야 한다. 회장이 어린 선수들을 만나고 식사를 갖이 하는 등의 단편적인 노력으로는 부족하다. 고액 연봉자들만의 조직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제 선수협은 리그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선제적으로 제시하거나 정책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을 정비하고 보다 유능한 인력 충원이 있어야 한다. 왜 메이저리그 선수협이 리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선수협을 보다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체제와 인적 구성으로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차기 지도부는 물론이고 앞으로 선수협이 이런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진, 글 : jihuni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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