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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군포시는 북으로 안양, 서로 안산, 동으로 시흥에 둘러싸여 있는 수도권의 도시로 행정구역 상 단위 면적이 전국 세 번째로 작은 도시다. 1989년 시로 승격되었을 만큼 도시의 역사도 길지 않다. 하지만 군포시는 그 안에 과거 농촌의 풍경과 구도심, 산본 신도시가 함께 모여 있는 다양성 가득한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19회에서는 이 군포시의 이런저런 면과 이웃들을 만났다. 

이른 아침 군포역에서 나와 과거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 앞에 섰다. 1919년 3월 31일 군포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큰 장이었던 군포장에서 약 2천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3. 1운동이 일제의 무력을 동원한 탄압으로 그 열기가 식어가는 와중에 군포 지역민들은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나라의 독립을 외쳤다. 이에 일제는 총칼로 이를 무력 진압했고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불의에 저항한 군포지역의 항일운동의 역사는 지금까지 지역민들에게 전해지지고 있다. 근대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에서부터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도심 곳곳에 선 벚꽃 가로수 길을 걸었다. 방송 당시 벚꽃은 절정을 지나 그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순백의 벚꽃잎이 가는 이의 발걸음을 자꾸만 멈추게 했다. 그 길을 지나 구도심의 오래된 마을을 찾았다. 낮은 담장과 단독주택과 다세대 주택이 혼재한 마을의 골목길은 좁지만 정겨움이 있었다. 그 골목 한 편에서 그림 작은 스케치북에 그림 그리기에 열중인 동호회 회원들을 만났다. 

그들은 군포 곳곳의 풍경들을 함께 화폭에 담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사라져가는 풍경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하는 마을 역시 재개발이 확정되어 얼마 안가 모두 사라질 운명이라 했다. 동네 주민들은 오래되어 낡고 불편한 생활 터전이 현대식으로 바뀌는 게 좋은 일이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을의 역사가 사라져가는 아쉬움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그 추억이 담긴 군포 구도심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겨 그 역사를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진과는 다른 각자의 개성으로 그려낸 군포 구도심 마을의 풍경은 그래서 더 특별해 보였다. 또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이들의 노력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구도심을 벗어나 군포 외각의 길을 걸었다. 그곳에서 철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지금은 그 모습을 찾기 어려운 방짜 유기를 만드는 공방이었다. 경기 지역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전통기술의 장인인 60년이 넘은 그의 내공을 조카에게 전수해 주고 함께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제 중년을 넘어 장년이 된 조카 역시 40년 경력의 장인이지만, 여전히 장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또 함께 기술을 보존하고 있었다. 마침 이 공방은 진행자인 김영철 배우가 30년 전 드라마 촬영을 했던 장소로 그 의미가 새로웠다.

이 공방의 대표적 작품은 징이었다. 징은 농악놀이의 악기로부터 무속인들에 이르기까지 그 용도가 다양했다. 그 용도가 따라 징의 소리가 다르다 했다. 공방의 장인들은 일반인들의 쉽게 구별할 수 없는 미세한 소리까지 잡아가며 징을 만들고 있었다. 이 공방의 징은 과학으로 설명이 안되는 장인의 감각과 숙련된 기술이 결합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이런 전통의 기술을 지켜가는 공방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군포를 상징하는 곳인 산본 신도시로 향했다. 봄의 한복판에서 이제는 시원하게 느껴지는 인공폭포를 지나 아파트들이 즐비한 신도시 풍경을 살폈다. 산본 신도시는 군포를 내려다보는 수리산 자락에 조성됐다. 그 조용한 농촌 마을은 이제 아파트로 가득한 도시로 변했다. 과거 수도권 1기 신도시가 한창 건설될 당시 만들어진 산본 신도시의 역사는 어느덧 30년을 넘어섰다.

산본 신도시는 군포의 도시 역사와 함께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 산본 신도시의 명소를 찾았다. 22만의 본의 철쭉들로 가득한 철쭉 동산이 그곳이었다. 봄이면 이 동산은 철쭉의 물결로 가득하다고 했다. 녹화 때는 아직 그 꽃이 피지 않았지만, 과거 장면들은 도시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꽃 풍경이었다. 이 철쭉 동산에서는 해마다 봄이 되면 철쭉 축제가 열렸지만, 코로나 사태로 지난해와 올해 행사가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은 군포시민들에게는 특별한 휴식과 여가의 공간인 건 분명했다. 다음 봄에는 흥겨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철쭉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다시 벚꽃들로 가득한 군포의 도심 거리를 걸었다. 그 길에 한 건물에서 요란한 밴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가니 40~50대 여성들로 구성된 밴드의 음악 연습이 한창이었다. 벌써 10년 경력이 된 이 밴드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이 밴드의 구성원들은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자녀들의 어머니로 구성된 엄마 밴드였다. 이들은 애초 발달장애 극복을 위해 자녀들이 밴드를 시작하면서 함께 모이게 됐고 서로의 아픔과 어려움을 공유하면서 큰 공감대를 가지게 됐다. 이후 이들은 자체 밴드를 조직하고 지역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일회성이 아닌 지속 가능한 밴드로 성장했다. 이 밴드는 공통의 아픔을 지난 이들의 소통과 치유의 수단이기도 했고 장애우들과 그 가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비뚤어진 시선을 이겨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밴드의 구성원들은 음악을 통해 행복과 삶의 희망을 찾고 더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엄마 밴드의 발전을 기원하며 또 따른 장소로 향했다. 

도시지역을 벗어나 농촌 풍경이 가득한 마을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농사일에 열중인 부녀를 만났다. 이들은 딸고 그 배우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운영하는 빵집을 식재료를 직접 재배 중이었다. 그 빵집으로 따라가 보았다. 그 빵집에서는 흔히 먹지 않는 대파 빵을 주메뉴로 하고 있었다. 직접 재배한 대파가 더해진 대파 빵은 대파의 향과 고소함이 더해져 있었다. 이 대파 빵은 특별한 빵을 만들고자 했던 젊은 부부의 아이디어로 개발됐다. 

이 부부는 함께 빵집을 열고 여느 자영업자들과 같이 자리를 잡는데 난관을 겪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들만의 빵을 만들겠다는 열정과 의지를 잃지 않았다. 이들은 딸의 아버지가 재배하는 농작물을 접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보다 대파 빵을 비롯한 새로운 빵을 개발했다. 직접 재배한 식재료가 들어가는 빵이라는 점에서 다른 곳과는 큰 차별성이 있었다. 이런 젊은 부부의 열정이 앞으로도 행복한 결과들만 만들어내길 기대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농촌의 풍경 속 한 저수지 인근에서 봄 햇살을 즐기는 상춘객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잔디밭에서 봄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잠깐의 여유를 뒤로하고 한옥들과 돌담이 인상적인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그 마을에서 오래된 한옥집이 있었다. 첫 건립 기원이 조선 정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군포 동래 정씨 종택인 이 한옥집에서는 노부부가 문풍지를 다시 붙이는 등 봄맞이 집 단장이 한창이었다.  

그 기분 좋은 분주함과 함께 집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안 곳곳을 둘러 봤다. 그곳에서는 보기 힘든 생활사 유물들이 있었다. 특히, 길 갈대모양의 어사화가 인상적이었다. 이 종택을 지키고 보존하는 노부부는 조상이 전해준 집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최근에는 종택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국가재산으로 기증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분명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들은 이 종택의 그들 가문만의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보호되고 전승되어야 할 문화재이지 공공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에 이들은 큰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종택은 재개발의 광풍에도 그 모습을 지켜갈 수 있게 됐다. 

군포 역사 유적을 뒤로하고 다시 도심으로 향했다. 군포역 인근의 번화가를 걷다 오래된 설렁탕집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 설렁탕집은 90살을 넘은 할머니에게서 그 딸에게로 대를 이어 그 역사를 지켜가는 중이었다. 군포 도시의 역사와 함께 한 이 설렁탕집은 과거의 방식 그대로 설렁탕을 끓이고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는 원칙을 지켜가고 있었다.

구순의 할머니는 지금도 식당에 나와 일을 거들고 있었. 할머니는 6남매의 생계를 위해 설렁탕집을 열었고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또 일했다. 힘든 일을 오랜 세월 하면서 몸은 늙고 약해졌지만, 그 맛을 지키는 사명감으로 설렁탕집을 지켜왔다. 할머니는 식당 일을 하면서 불편한 한복 차림을 고수했다. 요리와 손님들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담은 의미가 있었고 한결같은 마음을 지키기 위한 자신만의 다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때 한복은 지금고 보관되고 있었는데 낡은 한복에 베여있는 설렁탕 국물은 할머니의 요리에 대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할머니의 마음은 그 딸들에게도 전해져 이 설렁탕집의 맛 역시 한결같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렇게 그 역사를 지켜가는 설렁탕집을 지켜보면서 할머니는 과거의 힘들었고 고생했던 기억을 행복한 기억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군포시는 크지 않지만, 그 안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행정구역을 군포시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 군포시보다 오래된 그들의 역사를 마음 가득 간직하고 군포의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편이 되고 함께 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 가족들의 힘으로 군포에서 만난 이들은 행복으로 그들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런 행복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군포는 봄과 같은 따스함이 가득한 도시였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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