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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21회] 유서 깊은 전통의 도시 경북 영주에서 만난 사람들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5. 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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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는 대표적인 산지 지역인 강원도 영월과 충북 단양, 인근 경북 봉화와 접해있는 내륙 도시로 험난한 지형에 속해있지만, 내륙의 교통 요지로 오래전부터 중앙선과 영동선, 경북선 등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여기에 내륙을 이어주는 중앙 고속도로가 영주를 지나간다.

또한, 영주는 유서 깊은 역사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신라의 대표적 승려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전해지는 부석사가 자리하고 있다. 부석사의 대표적 건물 부석사 무량수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중 하나로 그 건축물 자제가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가 크다. 그 안에는 고려 시대 불상으로 역시 국보로 지정된 부석사 소조 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 밖에도 부석사에는 각종 국보급 문화재가 곳곳에 자리한 역사, 문화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영주는 조선시대 최초 서원으로 알려진 소수서원을 포함해 어려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다. 

이런 경북 영주를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21회에서 찾았다. 철도 교통의 요지 영주에 맞게 철도 건널목을 건너며 여정을 시작했다. 30년 경력의 철도 건널목 관리인을 통해 영주의 철도 교통의 역사를 잠시 들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경북 영주는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 그 역할을 했고 내륙과 내륙, 동해안과 내륙을 이어주었다. 지금도 영주는 철도교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 철도 건널목을 지나 오래된 누각인 부용대에서 영주 시내의 전경을 살폈다. 그 전망을 따라 내려가며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영주의 원도심 골목을 따라가다. 기차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인상적인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은 1960년대 영주지역 철도 역무원들의 관사가 많아 관사골로 불렸다고 했다. 그 이름을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사용되고 있었다. 지금은 그 관사를 사용하는 이들이 없고 상당수 관사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졌다. 얼마 안 남은 관사 중 한곳을 찾았다. 그 관사는 과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우리 생활상을 살필 수 있었다. 일본식 건물의 형태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 관사를 지키고 있는 집주인을 만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주에서 역장으로 근무했고 그는 어려서부터 이 관사에서 살았다. 이 관사는 지금은 보통의 집안 형태지만, 당시로는 파격적인 내부 화장실과 욕실을 갖추고 있었고 정원도 있었다. 집주인이 어린 시절 이 관사는 동네 친구들이 자주 찾는 놀이터였다. 집주인은 아버지 그리고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추억이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이 관사와 지금도 함께 하고 있었다. 지금은 곳곳이 낡고 빛바랬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공간을 그는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그 집과 주인은 상호 교감하며 늙어가고 있었다.  

영주 시내 시장을 찾았다. 조선시대 최초 서원이 자리를 잡을 정도로 영주는 다수의 선비들이 살았고 선비의 고장이라 불렸다. 그 탓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았고 제사 음식들이 발전했다. 영주 시장에서는 그 제수 음식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오랜 전통의 배추전 집에서 영주의 맛을 느낄 수 있었고 얼마 안가 문어를 취급하는 가게를 만날 수 있었다. 내륙 도시 영주지만 문어는 제사와 혼례, 장례를 포함한 각종 행사에서 빼면 안 되는 대표적 음식이라 했다. 동해안 지역에서 내륙을 통하는 기차가 지나는 영주의 특성은 동해바다의 각종 해산물의 물류 통로가 됐고 문어가 영주지역의 중요한 행사와 제사에 사용되는 이유가 됐다.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대표적 특산물과 된 것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영주시장과 영주의 맛을 함께 느끼며 다시 길을 나섰다. 

절정으로 향하는 봄 풍경을 살피며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에 발효 체험학교를 만났다. 지역민들이 참여하고 지역의 지역의 특색을 살린 사업인 영주지역 관광 두레사업의 한 부분인 이  발효 체험학교는 과거 양조장을 새롭게 해 만들어졌다. 이 양조장은 주로 술을 제조 판매했지만, 양조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은 딸이 이 양조장을 전통주를 만들고 그 방법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소통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발효 체험 학교를 통해 사람들과 전통주 제조 방법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한편 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전통주 제조를 위한 노력도 함께 하고 있었다. 젊은 층을 위한 트랜디한 막걸리 개발이 대표적이었다. 또한, 영주지역의 특산물과 전통주를 조합하는 전통주 개발에도 힘쓰고 있었다. 대표적인 특산물 풍기 인삼을 결합한 전통주는 지역 상생과 함께 지역을 알리는 전통주로 기대가 됐다. 

소백산맥 자락의 계곡을 따라 걸었다. 이 멋진 계곡을 트래킹 할 수 있도록 조성된 이 길은 할 소백산 자락길로 멋진 풍경과 청정한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주의 명소였다. 다양한 코스를 걸으며 탐방객들은 자신만의 힐링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자연을 지켜가며 그 자연의 멋을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영주의 계곡을 벗어나 농촌 마을의 길을 걸었다. 사과 농장에서 봄에 핀 사과꽃을 솎아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하는 그 작업장으로 들어갔다. 활달한 성격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손발을 맞추며 일하고 있었다. 드라마 등을 통해 보면 불편한 관계로 고부간이지만, 이 사과농장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그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들을 따라 함께 집을 찾았고 속 깊은 고부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좋을 리 없었던 그들의 관계를 세월의 흐름 속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돈독해졌다. 그 중간 갈등도 있었지만, 미운 정 고운 정이 뒤섞여 끈끈한 관계가 됐다. 시어머니는 그동안 고생했던 며느리가 안쓰럽고 며느리는 갈수록 쇠약해지는 시어머니를 걱정했다. 그런 마음이 모여 이제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되는 관계가 됐다.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흐르는 세월에 함께 맞서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이 함께 일하는 사과농장은 소통의 공간이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영주 풍기의 오래된 마을 길을 걸었다.  넝쿨이 감싸고 있는 집을 지나 세월 가득한 공장이 보였다. 그 공장에서 노부부가 인견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조 비단, 레이온으로 불리는 인견은 수분 흡수와 발수가 빠르고 정전기가 없다. 바람이 잘 통하고 잘 달라붙지 않고 여름에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인견은 1990년대까지 많은 수요가 있었다. 풍기는 이런 인견의 대표적 생산지였지만, 다른 섬유 소재들이 많이 나오고 수요가 줄었다. 이에 인견 제조 공장들이 상당수 문을 닫는 실정이다. 이 노부부는 풍기 인견의 역사를 지켜가고 있었다.

공장 사장님에게는 아픈 사연이 있었다. 북한 출신으로 6.25 전쟁 중 월남한 가족을 따라 영주에 정착한 사장님은 피난 도중 어머니가 폭격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눈앞에서 겪어야 했다. 그때는 철이 없이 실감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죽음이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노년이 되면서 그 아픔을 크게 느낀다고 했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그는 평생 마음에 담으며 살고 있었다. 그런 아픔에도 그는 그와 세월을 함께 한 공장과 오래된 기계를 지키고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풍기 인견의 역사를 이어가는 자부심은 그를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었다. 

다시 영주 시내를 걷다 한 식당을 들렀다. 그 식당의 주메뉴는 생소한 이름 태평초였다. 전통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메밀을 올리고 고기와 채소 등 각종 재료를 끓은 찌개의 형태인 태평초는 영주에서 맛볼 수 있는 서민 음식이었다. 태평초는 예로부터 산지가 많아 메밀 농사가 흥했던 영주의 지리적 특성이 반영된 요리이기도 했다. 이 식당의 태평초는 전통방식의 메밀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전통방식은 사람의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롭고 힘든 작업을 거쳐야 했다. 식당을 운영하는 노년의 부부는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작업의 어려움을 덜해주는 좌식 가마솥의 아이디어도 인상적이었다. 식당 사장님은 과거 식당을 운영하던 어머니의 손맛을 지키고자 전통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고집스러운 손맛이 더해진 이 식당의 태평초는 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영주의 또 다른 명소를 찾았다. 물 위에 뜬 섬과 같다 하여 물섬마을이라 불리다 무섬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과거 곳은 나무로 만들 좁고 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외나무다리는 남아있었다. 과거 외나무다리는 훨씬 좁고 약했다고 했다. 그 위태로워 보이는 외나무다리는 마을과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런 불편함은 마을이 세월의 풍파 속에서 변하는 걸 늦춰주었고 그렇게 지켜진 전통문화와 생활사의 흔적은 소중한 유산이 됐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인 무섬마을의 이런저런 모습을 살피다. 오래된 고택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고택에서 구순의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20살이 이 마을로 시집을 왔고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100년은 더 넘은 이 고택은 할머니의 인생이 담긴 장소였다. 이 고택에서 할머니는 고단한 시집살이를 견뎠고 8남매를 키워냈다. 할머니의 몸 곳곳에 남은 고단한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지금 할머니는 홀로 이 고택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삶에 외로움이 더해졌다. 할머니는 비록 순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의 여정과 함께 한 이 마을과 집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많은 세월이 쌓여 만들어진 익숙함과 포근함이 할머니에게는 이제 편안함이 됐다.

할머니는 꽃가마를 타고 들어왔다 꽃상여를 타고 나간다는 이 마을로 시집온 여성들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안타까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지만, 할머니는 이 마을과 함께 한 그의 삶의 역사를 지켜가는 중이었다. 인생의 황혼기에서 할머니는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할머니와 함께 늙은 고택과 함께 소중히 쓰고 있었다. 

이렇게 영주에서는 사라져가는 우리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눈에 보이는 유적뿐만 아니라 영주에서 만난 이웃들에게서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살아가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영주의 역사와 전통에는 오랜 세월 쌓이고 또 쌓인 보통 사람들의 삶이 함께 응축되어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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