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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역대 대통령 중 꼭 들어가는 이름 중 하나가 존 F 케네디다. JFK라는 약자로도 익숙한 케네디는 1961년 1월 20일 취임해 1963년 11월 22일, 암살범의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년여 남짓 재임한 대통령이다.

길지 않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케네디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 순위 1, 2위를 다툴 정도로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그 존재가 크게 남아 있는 대통령이다.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자 최초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다. 이런 특이성 외에 
케네디는 재임 기간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를린 장벽 설치 등 미. 소 냉전이 세계대전의 위기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는 리더십을 보였다.

또한, 인종차별 철폐 등 인권 신장, 복지 확대 등에 관심을 갖고 이에 필요한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여기에 항공 우주분야 발전을 위한 국가 차원의 연구 개발을 적극 추진했다. 케네디의 담대한 우주개발 계획은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했다. 이는 미국이 1969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우주인을 보내는 성과를 이루는 데 초석이 됐다. 

케네디는 미국 역사에 남을 연설로 기억되고 있는 그의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물으십시오'라고 하는 말과 함께 미국의 건국 후 발전에 있어 중요한 정신적 기반이었던 개척자 정신에 근거한 뉴 프런티어, 즉, 새로운 미국을 건설을 주창하며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케네디 일가 사진

 



케네디가 주창한 뉴 프런티어 정신은 미국민들에게 큰 울림을 줬고 그의 이전 미국 정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보적 정책과 어우러지며 그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사후에도 이어지도록 했다. 그리고 케네디가 속한 그의 가문은 미국 최고의 정치 명문가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으로는 가문의 일원 중 상당수가 대를 이어 각종 불행한 사건과 사고 속에 그 사망하면서 케네디가의 비극이라 할 정도로 비운의 가문이라는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케네디 가문의 뿌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아일랜드다. 케네디 가문은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이다. 아일랜드는 오렌 세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 속에서 아일랜드인들은 차별적 대우 속에 빈곤한 삶을 살았다. 19세기 중반에 닥친 아일랜드 대기근 기간에는 수많은 아일랜드 인들이 아사하는 비극도 있었다. 이에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현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의 이민을 택했다. 

그 아일랜드 미국 이민자들 속에 케네디 가문도 속해 있었다. 미국 정착 초기 아일랜드인들은 먼저 미국에서 터전을 잡고 있었던 다른 유럽계 미국인들 텃세에 시달려야 했다. 개신교 신자들이 대부분인 유럽계 이민자들 속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또 다른 차별의 대상이 됐다.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에서도 소수자로서 힘든 삶을 살았다. 대부분은 하층 노동자로서 삶을 영위해야 했다. 

케네디의 조부는 보스턴 항구에서 부두 노동자들의 상당수를 구성하는 아일랜드인들을 상대로 한 주점을 운영했고 그 주점이 성업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그는 주점을 운영하면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계 진출에도 성공했다. 케네디 조부는 보스턴 지역에서 하원 의원에 이어 상원 의원이 되면서 케네디 가문이 명문가로 발전하는 초석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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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가문이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전하는 데는 케네디의 부친 조셉 케네디의 역할을 컸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등교육을 받았고 명문대를 졸업했다. 또한, 기존 가문의 사업을 더 발전시키며 지역의 거부로 성장했다. 하지만 조섭 케네디는 그의 사업을 확장하면서 마피아와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밀주사업을 이용하는 등 부도덕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크게 성장하던 미국 주식시장에서 투자 성공으로 부의 단위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그 속에서 조셉 케네디는 주가 조작 등의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정계와 경제계 전반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된 조셉 케네디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할리우드의 성장기 속에 영화산업에 투자해 영화사를 설립했고 이는 가문의 또 다른 수익원이 됐다. 이를 통해 조셉 케네디는 정계와 경제계 그리고 미디어산업까지 미국 사회 다방면에서 성공한 인사로 자리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셉 케네디는 중앙 정계 진출에 성공했다. 그는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며 4선에 성공한 미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대통령 루스벨트와 관계를 맺으며 증권거래소 소장과 주 영국 대사 등 정부 요직을 역임하며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했다. 

조셉 케네디는 이런 자신의 성공을 대를 이어가며 지속되길 원했다. 그는 미국의 명문가 출신 여성과 결혼했고 4남 5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뤘다. 조셉 케네디는 자녀 교육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이어갈 4남들은 그 속에서 미국 초고 명문대학교 하버드를 졸업하며 상류층의 네트워크에 편입됐다. 조셉 케네디는 형제들의 경쟁을 부추기며 쉼 없이 아들들의 성공을 이끌었다.

존 F 케네디는 이 가문의 2남으로 태어났다. 애초 그는 첫째 형에 가려져 그 존재감이 크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기간 해군 장교로 참전해 전공을 세우면서 그 이름을 알렸고 전쟁 영웅으로 대중들에게 그 인지도를 높였다. 조셉 케네디는 향후 아들들이 정계 진출 등을 고려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들들의 군 입대를 적극 추진했다. 가문에서 가장 촉망받았던 장남 조셉 케네디 주니어 역시 공군 장교로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로 전장에서 활약했지만, 불행히도 비행기 폭발 사고에 희생되면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케네디 가문 저주의 시작이었다.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

 



이후 가문의 기대는 존 F 케네디에 집중됐다. 케네디는 가문의 높은 인지도와 전쟁 영웅 이미지 등을 더해 20대 나이에 빠르게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가문의 후광과 재정적 지원, 젊은 역동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29살 나이에 연방 하원 의원에 당선된 데 이어 연방 상원 의원까지 막힘없이 순항했다. 

정치인 존 F 케네디의 여정은 1958년 연방 상원 의원 재선으로 이어졌고 그가 속해 있던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권후보로 그 입지가 크게 격상했다. 결국, 케네디는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고 당시 여당인 공화당 후보였던 닉슨과 대선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선거의 흐름은 공화당의 우세였다. 여당인 공화당 소속의 대통령 아이젠 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으로 재선 성공하며 최고의 인기를 유지했고 퇴임 시점에도 그의 인기를 여전했다. 그의 부통령으로 함께 했던 공화당 대선 후보 닉슨은 케네디와 비교해 오랜 정치 경력에 안정감을 주는 정치인이었다. 많은 이들의 전망은 공화당 닉슨의 승리였다. 케네디가 40대 젊은 나이에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데에는 상대적으로 승리 가능성이 낮은 대선 분위기도 크게 작용했던 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변수가 발생했다. 미국 대선에서 처음 시도되는 대선후보 간 TV 토론은 분위가 반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흑백 텔레비전이었지만, 대통령 후보들을 실시간으로 보고 그들을 평가할 수 있는 장면은 젊고 역동적인 케네디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의 케네디

 



케네디는 TV 토론 내내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며 어색함을 지우지 못했던 닉슨과 대조를 보였다. 이를 위해 케네디는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상당히 공을 들렸다. 또한 선거 운동 과정에서도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이는 일찍부터 영화산업에 투자하며 미디어 산업에 정통했던 그의 부친의 영향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달라진 선거전의 흐름을 잘 활용한 케네디는 열세의 흐름을 접전으로 바꾸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1960년 43살, 미국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하지만 그의 대통령 당선 이면에는 어둠도 존재한다. 케네디 가문과 대대로 관계를 이어온 마피아 유착설이 여전히 존재했고 케네디 가문의 비극도 이어졌다. 1948년 넷째 딸 캐서린 케네디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선천적으로 지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던 셋째 딸 로즈마리 케네디는 가문의 치부가 드러날 것을 염려한 케네디의 부친에 의해 그 존재가 철저히 숨겨졌다. 또한,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검증되지 않은 무리한 뇌 수술로 상태가 더 악화되기도 했다. 결국, 로즈마리 케네디는 생애 대부분을 요양원에서 보냈고 2005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케네디 가문의 성공 이면에는 불법과 비 인간성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통령 케네디는 젊고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리더십으로 미국을 이끌며 큰 지지를 받았다. 케네디는 새로운 미국, 뉴 프런티어, 개척자 정신을 주창하며 미국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했고 사회복지 확대를 추진했다. 또한, 국가 차원의 우주개발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며 이 분야에서 미국이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케네디 암살 직후 장면

 



이런 내부로부터의 개혁과 함께 케네디는 세계대전의 위기로 발전할 수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강력한 지도자의 면모를 과시하며 소련에 강하게 대응했고 전쟁위기를 극복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전쟁 위험을 벗어나 화해 무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렇게 케네디는 이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볼 수 없었던 보다 진보적인 사고에 기반한 정책과 과단성 있는 외교 등으로 강하면서도 스마트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아울러 미국이 자유 민주주의 진영을 이끄는 선도 국가로서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줄 수 있었다. 

또한, 케네디는 지금도 미국인들에게 최고의 대통령 영부인으로 기억되는 재클린 케네디와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이미지 상승효과를 더했다. 젊은 대통령 내외와 그 자녀들의 행복한 모습은 미국 국민들에게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었고 이는 케네디 대통령의 긍정적 이미지 구축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사생활 면에서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과의 스캔들은 그의 도덕성에 큰 마이너스 요소였다.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였던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은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는 존 F 케네디는 물론이고 그의 동생이자 정치적으로 최측근 인사로 법무부 장관으로 일했던 로버트 케네디와의 염문설이 나올 정도로 복잡하게 얽힌 관계였다. 

 

 

로버트 케네디

 



이런 마릴린 먼로가 돌연 사망하면서 케네디 대통령 형제와 마릴린 먼로의 스캔들과 관련한 여러 풍문들은 대중들에게 더 퍼져 나갔다. 마릴린 먼로의 사망이 약물 과다 복용이라는 발표가 있었음에도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죽음과 관련해 정보기관에 의한 타살설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문제에도 케네디 대통령은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 재선의 가능성을 높였다. 케네디는 재선을 위한 정치적 활동의 일환으로 당시 지지율 열세 지역이었던 텍사스 방문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이는 케네디가 최악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텍사스주 대표 도시 댈러스를 방문했다. 그는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고 카퍼레이드를 하며 숙소로 향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의 일정을 파악하고 인근 건물에 숨어있던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의 총탄에 목과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미국 국민들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던 대통령의 댈러스 카페레이드 장면이 상상하지 못했던 비극적인 장면으로 바뀌는 순간을 함께 했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미국 국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최고의 경호를 받는 대통령이 대낮에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범인이 20대의 젊은 청년이었고 그의 단독 범행이었다는 발표는 여러 의혹들을 불러왔다. 오스왈드가 호송 도중 잭 루비라는 나이트클럽 사장에게 암살당해 사망하면서 사건의 진실은 더 깊이 묻히고 말았다. 또한, 잭 루비마저 감옥에서 지병으로 돌연사 하면서 사건은 더 큰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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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드라마 같은 상황 전개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해 여러 의혹과 그에 근거한 음모론을 양산했다. 지금도 미국 국민들의 상당수는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미국 정보기관이나 마피아 등의 배후설이 여전히 설득력을 얻고 있다. 관련 사건 기록들이 정보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되면서 의혹들이 조금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대중들의 의문은 더 커졌다. 

그만큼 케네디의 암살은 미국인들에게 집단 트라우마를 가져올 수 있는 충격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음모론은 그의 황망한 죽음에 대한 미국민들의 안타까움이 더해진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케네디 가문의 모든 역량이 더해진 결과물인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은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다. 케네디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 정치적 후계자이기도 했던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1964년 연방 상원 의원 당선 이후 대선 후보로의 길을 순조롭게 걸었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이었던 1968년 캘리포니아 예비경선에서 서 아랍계 청년에서 암살당하면서 40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케네디가 자식들의 5번째 비극이었다. 

1969년에는 케네디 가의 중심이었던 조셉 케네디가 사망했다. 그는 가문을 미국 최고 정치 명문가로 만들었지만, 자식들의 거듭된 비극을 겪은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 

케네디 가문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조셉 케네디 4남인 에드워드 케네디가 대권 후보에서 사실상 멀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1969년 불륜설과 함께 많은 의혹을 남긴 음주운전 교통사고와 그와 동승했던 여비서가 사망한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자신의 지역구 상원의원으로 다선에 성공하긴 했지만, 더 이상의 정치 경력은 쌓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케네디 가문은 대를 이어서 그 손자대에도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고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케네디가의 비극이 하나의 명사처럼 사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케네디 가문의 어두운 이면에도 케네디 대통령이 집권했던 기간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고 진보적이었고 세계 선도 국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당시 미국인들의 국가에 대한 자긍심은 매우 컸다. 이후 미국은 냉전체제를 승리로 이끌며 절대 1강 국가로 자리했고 세계 정치 경제를 주도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미국이 선도국가가 되는 데 있어 큰 이유가 됐던 선진적인 정치 시스템과 고도의 민주주의 구현 역시 퇴색되고 있다. 인종차별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사회 갈등의 요소가 되고 있고 정치는 사회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극한 대립 속에 사회 갈등을 더 촉진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내부의 갈등과 빈부 격차 등 누적된 사회문제는 더 심화되고 있다.

어쩌면 미국인들은 과거 영광스러웠던 미국의 역사를 주도했던 케네디와 같은 정치인을 고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케네디 가문에 대한 미국인들의 감정은 그 점에서 특정 가문에 대한 향수보다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열망이 함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 위키백과,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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