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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얼마 전까지 중랑구 망우리라는 지역의 이름은 공동묘지를 뜻했다.  실제 중랑구 망우산 일대 조성된 망우리 공동묘지는 1930년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 의해 조성됐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그에 비례해 사망자들의 묘지가 부족하게 됐다. 이에 총독부는 서울 4대문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으로 4개의 공동묘역을 조성해 묘지 수요를 충족시키려 했지만, 인구의 지속 증가와 서울의 확장으로 묘지 부족 현상이 더 커졌다. 

이에 총독부는 지금의 중랑구 망우동 지역 망우리에 대규모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그 규모는 52만여 평에 이르렀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의 시작이었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일제 강점기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애국지사들과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사후 안식처이기도 했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는 1945년 광복과 이어진 6.25 한국전쟁의 격동기 속 수많은 희생자들이 함께 하며 근.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품고 가는 장소이기도 있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망우리 공동묘지는 해마다 추석이나 설 명절 때 수많은 성묘 참배객들이 모이는 서울의 대표적 공동묘지가 됐다. 

하지만 그 넓은 묘역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수용 능력에 한계가 발생했고 공동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는 망우 묘지공원, 망우리 공원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독립운동가 및 애국지사들과 문화 예술인들의 얼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사회 각계에서 이 지역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방송 링크

https://youtu.be/0C0aciQgm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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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망우리 공동묘지는 1990년 대 후반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의 추모비가 건립되고 그들의 추모하는 행사가 지속적으로 열리면서 역사적인 장소로 변모해 갔다. 마침내 2013년 이 일대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고 공원화를 위한 공사가 잇따르면서 이 지역은 시민들의 여가 선용의 공간, 역사 공부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최근에는 추모공원이자 역사적 공간인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변모했다.

TBS의 역사 기행 프로그램 '역사스테이 흔적'에서는 이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찾아 이곳의 역사와 함께 이곳에 잠들어 있는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외에도 그들의 조력자로서 함께했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 조명했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따라가다 가장 먼저 만난 이는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인 유관순 열사였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학생이었지만, 3.1 운동에 참가했고 고향인 천안을 귀향한 이후에는 그 지역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도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유관순은 재판 과정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 감독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강력히 일제에 저항했다. 이에 유관순은 엄청난 고문과 가혹행위에 시달렸고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의 시신은 그가 학생으로 있었던 이화학당 교장에게 인계되어 장례가 엄수됐다. 이후 유관순의 시신은 이태원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이곳이 일본군의 주둔지가 되면서 강제 이장됐다. 문제는 유관순이 천안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할 당시 함께 참여했던 부모님이 일제 경찰의 총탄에 사망하고 그의 묘역을 돌볼 유족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유관순의 시신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다른 무연고자들과 함께 합사되어 지금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모역에 합사되고 말았다. 유관순의 묘소는 합사된 묘지에 세워진 표지비로 그 존재가 남아있게 됐다. 

 

 

유관순

 



이런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만난 유관순 열사의 표지비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또한, 그 외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존재가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고 잊혀져 간 현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이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여정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조력자로 활발히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으로 향했다. 

첫 번째 인물은 안창호의 비서이자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눴던 독립운동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3.1 만세운동 당시 경성의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으로 이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에도 사회 엘리트로 촉망받는 직업이자 미래가 보장된 직업인 의사가 되는 길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상규는 더 나아가 애국계몽 운동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와 미주지역 독립운동 조직인 흥사단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비서로 활약했다. 유상규는 3.1 만세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요 인사가 된 안창호를 따라 상해행을 택했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 유상규는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 조직 간의 소통 기관인 교통국, 연통제 조직에서 일하며 독립자금의 모금과 송금, 독립운동가들의 모집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런 유상규를 안창호는 매우 아끼고 가까이 두며 함께 일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1920년 초반 존립을 위협받게 된다. 일제의 방해공작이 본격화되고 임시정부 내 노선 갈등이 첨예화됐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활동만을 고수하며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오지 않는 건 물론이고 임시정부 내 갈등을 해결할 지도력을 보이지 않았다.

 

 

유상규가 속한 흥사단 단체 사진

 



그가 6년의 대통령 임기에서 상해에 머문 기간은 불과 6개월이었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1919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을 주도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승만에 대한 독립운동가들의 신뢰가 크게 상실됐다. 이는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에 또 다른 원인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1925년 3월 18일 지금의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됐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는 분열을 거듭했다. 리더십이 흔들리고 주요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났다. 임시정부의 개혁 시도도 내부 분란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임시정부의 이런 상황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임시정부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권위를 흔드는 일이었다. 재정 문제마저 심각해지면서 임시정부는 사무실 운영조차 어려운 처지로 몰렸다. 

안창호는 마지막까지 임시정부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지만, 이 시도마저 실패했다. 임시정부의 조직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은 흩어졌다. 안창호 역시 하는 일이 없어진 최측근 인사 유상규를 계속 상해에 머물게 할 수 없었다. 유상규는 1925년 다시 국내로 돌아와 중단했던 의학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1927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의사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접은 건 아니었다. 그는 의사로서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한편 후배 양성과 함께 보건위생 계몽활동에도 앞장섰다. 이를 위한 강연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의사협회를 창설해 핵심 인사로 활약했다. 한편으로서는 안창호가 창설한 독립운동 단체인 흥사단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안창호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던 유상규는 안타깝게도 1936년 병으로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우리나라 의학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그의 순국은 독립운동에서도 국가 발전의 측면에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의 장례는 국내에 있었던 안창호가 주도했다. 안창호는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잇따라 일어나며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가 다시 존재감을 되찾고 대중국 협력이 본격화되는 시기,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됐고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상황이었다

안창호 역시 큰 지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가장 아끼던 아들과 같았던 유상규의 갑작스러운 순국은 너무나 아픈 일이었다. 안창호는 유언으로 유상규 곁에 자신의 시신을 안장해 달라고 있다. 그렇게 두 독립운동가는 망우역사문화공원 한편 지근거리에 조성됐다. 그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 하게 됐다. 이후 안창호의 유해는 새롭게 조성된 도산공원으로 옮겨졌고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그의 가묘만 남아있다. 하지만 유상규는 여전히 그 곁을 지키고 있다. 

안창호와 유상규의 이야기와 함께 망우역사문화공원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은 김구의 측근 인사로 활약했던 박찬익이다. 그는 중국어에 매우 능통했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의 대중국 소통 등 외교 업무를 총괄했다. 그를 통해 임시정부는 중국 장개석 정부와 활발히 소통할 수 있었고 1932년 윤봉길의 상해 의거를 계기로 장개석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막후에도 역할을 했다.

 

 

박찬익
김구

 



박찬익은 이후에도 임시정부의 대외, 재정 업무를 하며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 존재가 대중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박찬익은 김구의 측근이었지만, 그와의 의견 대립을 겪으며 임시정부의 요직을 떠나는 강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온 박찬익은 임시정부의 중요 인사로 광복까지 함께 했다. 광복 이후에도 박찬익은 중국에 남아 중국에 남아있는 교포들의 생명과 권익을 보호하는 일에 매진했고 국공 내전 발발 시 장개석 정부를 지원하는 한인 부대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박찬익은 여러 계파로 나뉜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민족주의 진영의 통합을 위해 김구와 이승만의 화해와 협력을 지속 추진하고 이를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9년 3월 순국했다. 그가 순국한지 얼마 안 된 시기, 김구가 암살되며 박찬익이 생애 마지막까지 꿈꾸던 민족주의 세력의 통합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망우 역사문화공원에 있는 그의 묘소는 그가 1993년 국립묘지에 다시 안정되며 허묘로 남아있다. 하지만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이 쓴 그의 묘비석이 그의 흔적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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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 명의 인물 방정환이 있다. 방정환 하면 어린이날을 재정하고 어린이 우리나라 최초로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들을 위한 인권 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방정환은 이런 어린이 인권운동 이전에 동학을 계승한 민족종교 천도교에 귀의해 그 안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했었다. 그는 천도교 내 청년 조직에서 활동하는 한편 문학가의 면모도 보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도 참여했다가 이제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이후 방정환은 일본으로 건너가 아동문학이나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며 관련 지식을 더 쌓았고 어린이들의 위한 잡지를 창간하며 어린이 운동을 더 구체화했다. 방정환을 중심으로 발간되는 어린이 잡지는 이전에는 없었던 어린이 동화가 연재되거나 해외 작품들이 번역 소개됐고 동요 등의 보급도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많은 아동 문학가와 작가들이 나타나고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마련될 수 있었다.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은 왜곡된 유교의 가치관 속에 소외되고 학대와 멸시를 당하는 어린이 이들이 어른과 같은 인격체임을 알리는 한편 어린이들의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의 미래를 밝게 하는 일종의 독립운동이었다. 또한 동요와 동화의 보급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방정환

 



하지만 그의 노력은 일제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재정적 어려움이 함께 했다. 이로 인해 방정환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홀로 동분서주하며 과로를 달고 살았다. 이에 그는 지병이 크게 악화되면서 1931년 31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여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그가 시작한 어린이 운동은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어린이들의 인권 신장에 큰 영향을 줬다. 그가 제정한 어린이날 역시 연중 가장 중요한 날로 계승 발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민족 시인이자 불교 지도자였던 독립운동가 한용운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비운의 정치인이었던 조봉암, 천재 화가였지만, 불우한 삶을 살다간 이중섭, 그 밖에 근.현대사를 치열하게 살았던 저명 인사들의 묘소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제 잘 조성된 공원길을 산책하며 그들의 흔적을 찾는 것도 이 공원을 방문한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TBS 역사스테이 흔적에서 찾은 망우역사문화공원편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재발견하고 방정환의 새로운 면을 살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시즌 3로 이어지는 역사스테이 흔적은 열악한 제작 여건에도 TBS가 공영 방송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지속 제작 방송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전부터 함께 했던 역사 학자 심용환에 아이돌 출신 연예인 수빈과 대한 외국인 안젤리나 다닐로바가 함께 하며 스토리에 재미를 더하고 역사를 함께 배워가는 형식으로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시즌 3, 첫 회에는 동대문구에 숨어있는 역사와 명소들을 살피는 시간을 가졌고 두 번째 방송에서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우리 역사의 여러 면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런 TBS의 유익한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사진 : 위키백과, TBS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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