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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포츠사에서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그 대회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은 1위와 3위에 입상했다. 그들의 쾌거는 일제 강점기 억압받던 조선인들에게는 민족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일이었다.

두 선수의 입상이 중요했던 건 식민지 국민으로 불가피하게 일본 선수로 올림픽에서 참가했지만,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손기정은 한글로 사인을 해주는 등 대회 내내 자신의 조선인임을 밝히고 말과 행동으로 일제에 맞섰다. 남승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선수는 서로를 의지하며 올림픽에 참가했고 조선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했다. 
 
두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과 동메달과 관련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불러왔다. 당시 두 선수의 입상 소식을 전하던 신문사에서 사진 속 선수들 유니폼에 있던 일장기를 없애 기사를 낸 일장기 훼손 사건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언론과 출판 관련 검열을 지속 시행하던 조선 총독부는 관련 신문사와 관계자들을 강제 수사하고 탄압했다. 결국, 일장기 훼손 사건은 관련 언론사의 휴간과 폐간으로 이어졌다.

그 여파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삶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귀국 후 일제 경찰에 의해 연행되듯 이끌려 군중들과 분리됐고 됐고 일제의 감시 속에 살아야 했다. 또한, 마라토너로서 그 이력도 쌓을 수 없었다. 20대의 나이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는 은행원으로 직장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는 자발적인 결정이라 했지만, 일제의 압력이 상당 부분 작용한 일이었다. 

 

 

 



한국 마라톤의 영웅, 손기정 그리고


 
이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손기정은 한국 마라톤의 영웅으로 그 이름을 후대에 알렸고 광복 후 국가적으로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또한, 광복 후 마라톤 후진을 양성하고 체육계의 대표적 인사로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에서는 최종 성화 봉송 주자로 태극기를 달고 개막식이 열리는 메인 스타디움을 달리며 큰 소원을 이루기도 했다. 손기정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국가 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손기정 영광 뒤에 가려졌던 또 한 명의 위대한 마라토너를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남승룡, 그는 손기정과 같은 해인 1912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운동에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은 마라톤 선수로 발현됐다. 
 
그는 타고난 운동선수로서의 재능과 함께 마라톤에 대한 열정도 가득한 선수였다. 대표적인 일화로 그는 학창 시절 방학을 맞이해 고향인 순천으로 내려가는 길을 기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뛰어서 내려갔다고 전해진다. 그는 천상 마라톤 선수였다.
 
남승룡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마라토너였고 그 역량은 일본 유학 중에도 드러났다. 남승용은 일본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도 연거푸 우승하며 그 명성을 드높였다.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올림픽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이런 시기 마라톤에 재능 있는 동갑내기 선수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서울로 내려와 그의 동료가 된다. 그가 손기정이었다. 손기정은 매우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홀로 마라톤에 정진했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서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남승룡과 손기정은 가정 형편이나 고향, 성격에서도 크게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마라톤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금세 절친이 됐다.
 
마라톤 경력이나 그동안의 성과면에서 남승룡은 손기정에 앞서 있었고 이런 그에게 손기정의 빠른 성장은 위기감으로 다가올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나날이 깊어졌다. 일제 강점기 남모를 차별 속에서 살아야 했던 두 젊은이들이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은 강한 연대였을지도 모른다.  

 

 


주목받지 못했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서로를 의지하며 두 선수는 일제 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대표하는 마라토너로 성장했다. 베를린 올림픽을 앞둔 대표 선수 평가전에서도 두 선수는 우수한 성적으로 마라톤 대표 선수로 당당히 선발됐다. 일본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낸 이 결과는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아주 기쁜 일이었다. 특히, 올림픽에서 마라톤이라는 종목이 가지는 비중을 고려하면 조선인이 2명이나 일본 대표팀에 선발됐다는 건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런 결과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제는 조선인이 두 명이나 대표팀에 선발된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두 선수 중 한 명을 탈락시키기 위해 여러 경로로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심지어 마라톤 경기가 열리는 독일 현지에서도 일본인 선수를 더 포함시키기 위한 꼼수를 부렸다. 이를 위해 일제는 3명의 엔트리에 선수를 추가해 독일로 파견했고 두 선수 중 한 명의 대표팀 사퇴를 압박했다. 이에 손기정과 남승용은 굴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이 대표팀을 사퇴하겠다고 하면서 맞섰다.

아마도 일제는 두 선수가 모두 출전을 양보할 것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선수는 자신의 마라토너로서의 기회보다는 조선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지켰고 불의에 저항했고 동료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독일 현지에서 다시 한번 평가전을 가지도록 했다.
 
일제는 혹시 모를 변수를 기대했지만, 두 선수는 압도적 기량으로 일본 선수들을 따돌렸다. 일본 선수들은 평가전 과정에서 남몰래 지름길로 레이스를 하는 등의 편법을 쓰기도 했지만, 두 조선 선수들의 기량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남승룡이 부정행위를 한 일본 선수를 강하게 꾸짖고 질책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일제는 더는 조선 선수들을 배제할 명분이 없었다. 만약, 강압적인 방법으로 선수를 교체한다면 국제적 망신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두 선수의 강한 연대가 결국, 일제의 방해를 이겨낼 수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당일, 손기정은 2위 그룹에서 선두를 추격했고 남승룡은 그의 마라톤 스타일 대로 막판 스퍼트를 위해 후위 그룹에서 레이스를 했다. 중반 이후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선수가 오버 페이스로 중도 기권을 하면서 레이스는 손기정이 단독 선두로 나서며 독주하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손기정은 세계 신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영광을 안았다.
 
이런 손기정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사이 남승룡은 특유의 엄청난 스퍼트 능력을 발휘하며 하위권에서 여러 선수를 제치고 동메달을 따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남승용의 분전과 함께 일제 강점기, 조선인 두 명이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서는 영광을 맞이할 수 있었다. 두 선수의 서로에 대한 강한 믿음과 우정, 선의의 경쟁이 이룬 성과였다.
 
하지만 그 영광은 손기정에게 집중됐습니다. 손기정은 민족의 영웅이 됐지만, 남승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일장기 훼손 사건 역시 손기정의 그 중심이었다. 역사가 손기정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영웅으로 기록하는 사이 남승용은 마라톤 지도자로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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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국제 마라톤 우승, 1947년 보스턴 마라톤


 
그러던 남승룡이 다시 한번 주목받을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광복 후 손기정은 개인적으로 마라톤 선수 양성을 시작했고 절친이었던 남승용에게 함께 하기를 청했다. 당시 남승룡은 마라톤 팀 코치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승룡은 흔쾌히 손기정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선수들과 함께 한 집에서 수식을 함께 하고 훈련하며 선수들의 기량 발전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대선배들의 솔선수범에 젊은 선수들은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남승룡은 그곳에서 손기정 보다 더 많은 지도자 경력에도 코치로서 손기정을 보좌하며 헌신했다.
 
1947년, 훈련의 성과를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세계 최고의 권위의 마라톤 대회인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올림픽 외에는 마라톤 국제 대회 존재를 잘 알리 못했던 손기정, 남승룡에게는 큰 의욕을 가질 수 있는 대회였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함께 훈련하던 선수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서윤복과 함께 보스턴 마라톤 출전을 결정했다. 서윤복은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미래 꿈을 키워가는 청년이었다. 그는 힘든 일상에서도 마라톤 훈련에 성실히 임했고 그 성실함이 손기정과 남승룡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들의 대회 참가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1947년은 광복 후 미 군정 시기로 아직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었다. 국가 존재가 없는 상황에서 국제 대회 참가는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미 군정의 허가를 얻어 하와이와 미국의 다른 도시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언어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공항에 구금되는 일도 있었다. 우연히 한국인 목사의 도움을 받아 그 상황을 벗어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선수단은 대회를 얼마 안 남겨두고 가까스로 보스턴에 도달할 수 있었다. 현지 적응에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선수단은 현지 교민들의 협조를 얻어 적응 훈련을 할 수 있었고 대회 중에도 교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남승용이 노력이 더해졌다.  남승용은 마라톤 풀코스 경험이 부족한 선수였던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로 함께 대회에 나섰다.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에 현역 선수에서 오래전 물러난 남승용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승룡은 서윤복의 자신감을 더해주고 개인적으로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서 뛰고 싶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함께 레이스에 나섰다.
 
남승룡과 함께 달리며 초반 고비를 넘긴 서윤복은 중반 이후 페이스를 끌어올렸고 수 킬로의 오르막이 이어지는 힘든 구단에서 경쟁 선수를 따돌리며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그 과정에서 마라톤 코스에 난입한 강아지로 인해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하지만 서윤복은 그런 난관을 모두 이겨냈다.

결국, 서윤복은 손기정이 가지고 있었던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며 1위로 결승선에 도착했다. 한국의 국제 마라톤 대회 최초 우승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성과였습니다. 이는 신생국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높일 수 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서윤복이 챔피언의 영광을 누리는 과정에도 남승룡은 레이스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보통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로 나선 선수는 일정 거리를 달리고 경기를 포기하는 게 보통이지만, 남승룡은 달랐다. 
그는 마지막까지 레이스를 이어갔고 자신의 장점인 막판 스퍼트로 하위권에서 순위를 끌어올렸습니다. 남승룡은 대회 12위로 결승선에 도착했다. 은퇴 시기를 한참 넘긴 나이 등을 고려하면 그 또한 놀라운 결과였다. 

 

 

보스턴 마라톤 후 귀국길, 선수단과 김구 (가장 오른쪽 남승룡)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의 숨은 조력자 남승룡


이렇게 남승룡은 스포트라이트를 동료에 내주긴 했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1947년 보스턴 마라톤까지 한국 마라톤의 가장 빛나는 순간마다 선수로 함께 했다. 모두 그가 없었다면 우승의 영광을 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승룡은 그 영광의 빛을 아주 조금 나눠 받아야 했다. 소위 말하는 1등만 기억하는 현실 속에 남승룡의 이름은 더 빠르게 사람들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남승룡은 이후 지도자로 체육계 인사로 그 역할을 했지만, 마라톤 우승자 타이틀 가진 손기정, 서윤복에 비교해 그 존재감을 크지 않았다. 각종 훈장과 포상에서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손기정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 각종 다큐멘터리가 제작됐지만, 남승룡에 대한 재조명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절친인 손기정도 생전 자신에 가려져 조명 받지 못한 남승룡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남승룡은 묵묵히 마라톤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2001년 2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그의 고향인 순천에는 그를 기리는 남승룡로가 있고 기념 마라톤 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비록, 남승룡은 크게 빛나지 못했지만, 선수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한국 마라톤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조력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손기정도 없었고 서윤복도 없었다. 그 또한 마라톤 영웅이었다. 

올해 추석 연휴에 개봉하는 영화 1947 보스턴은 손기정을 중심으로 그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그가 감독으로 함께 한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남승룡은 손기정, 서윤복에 가려진 조연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남승룡의 진짜 모습은 아니다. 

이렇게 남승룡과 같이 우리 역사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들이 다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지만, 역사의 기록이 다양하게 기록되고 보전될 수 있는 현대에서도 역사가 승자만을 위한 기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인물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고 가치를 인정받는 세상이 될 때 그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제2, 제3의 남승룡이 자랑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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