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치열한 드라마 경쟁 속에 선전하고 있는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은 이제 2차 거란 전쟁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은 1010년 12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이어진 전쟁이었고 고려는 993년 거란의 1차 침공 시 서희의 뛰어난 외교술로 획득한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의 강동 6주를 요새화하면서 방비한 덕에 거란군의 강동 6주 점령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황제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선 정복 전쟁을 성과 없이 끝낼 수 없었던 거란은 고려 왕을 잡아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강동 6주의 요충지와 서경성마저 지나친 채 남진을 강행했고 고려 수도 개경까지 함락하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후방에서 양규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이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후방을 교란하면서 전쟁 상황이 변했다. 특히, 거란군이 고려 내 보급 기지로 삼았던 곽주성이 양규가 이끄는 고려 결사대에 점령당하면서 거란군은 고려 깊숙이 고립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 사이 고려 왕이었던 현종은 강감찬 등의 주장에 따라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하기 전 남쪽으로 몽진을 떠났고 거란군의 전격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거란군은 고려 왕을 잡기 위해 남진과 철군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했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도 이 부분이 거란의 시각에서 내용에 포함되기도 했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나오는 고려 현종의 몽진
사실상 군수물자의 보급이 끊어진 상황에 후방에서 계속되는 고려군의 위협, 익숙하지 않은 고려 남쪽 지리로 인한 지속 남진의 위험성, 여기에 유목 민족의 정복전쟁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는 전쟁 기간의 한계성 등 거란군은 장기간 고려에 머물기 힘든 상황이었다. 몽진이라 하지만, 사실상 거란군을 피해 도망친 고려 현종과 고려 조정의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거란군은 더 이상 남진을 하지 못했고 개경 이남의 고려 영토가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이후 고려 거란 전쟁에 고려가 대비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었다.
13회까지 진행된 드라마는 거란군의 남하를 막아내며 분투했던 흥화진 전투와 이어진 강동 6주 지역에서의 고려군 분전, 서경 방어전을 둘러싼 고려와 거란의 지략 대결, 거란군을 상대로 하는 고려군 내부의 난맥상 등이 다뤄졌다. 현재는 거란군의 철군을 유도하려는 강감찬의 분투와 역사상 가장 험난한 몽진으로 기록된 고려 현종의 상황을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현종은 몽진 과정에서 수차례 거란군이 아닌 고려인들에게 신변의 위협을 당하며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계속되는 신변 위협에 현종은 함께 몽진길에 나선 왕후를 친정으로 보내고 홀로 나주까지 몽진을 지속해야 했다. 그만큼 그의 상황이 급박했음을 알 수 있다.
전시 상황이라고 하지만, 왕의 목숨을 노리는 세력들이 있었다는 건 당시에도 고려가 완전한 중앙 집권제를 이루지 못했음을 방증하고 있다. 만약, 현종이 당시 시해를 당했다면 고려는 전쟁의 구심점을 잃고 상당한 혼란에 빠져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고려가 지속 항전을 하는 데 있는 동력을 상실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왕이 적을 피해 도망을 한다는 건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었지만, 왕이 곧 국가가 되는 시대상 속에서 항전을 지속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종은 함경도 일대 동북면의 장수였지만, 현종의 명으로 서경성 방어전을 수행했던 지채문을 포함해 헌신적으로 그를 보필한 장수들과 신하들에 의해 위기를 넘겼고 나주까지 몽진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애초 현종의 몽진을 주장했던 강감찬은 역사 자료에서 그의 몽진을 수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지채문의 활약이 정확히 남아 있을 뿐이다.
아마도 전후 강감찬이 조정의 중심인물이 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는 몽진 도중 도망을 간 다른 관리들과 수행원들과 달리 별도의 명령을 수행했거나 전장에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드라마에서는 강감찬이 거란의 남진을 막기 위해 거짓 항복을 통한 공작을 펼치거나 거란 총사령관 소배압과 내통하는 등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강감찬의 활약상이지만,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도 강감찬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종의 나주 몽진
한편, 현종의 몽진에서 마지막 종착지였던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의 후삼국 패권 경쟁을 하던 시기 후백제 영토 내 일종의 전진기지로 그의 또 다른 정치적 기반이 된 곳이었고 나주의 호족 출신의 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왕건 사후 고려 2대 왕에 오른 혜종이 되었을 만큼 왕건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었다.
그 관계는 왕건 사후에도 이어졌던 것으로 보이고 현종이 거란군의 위협이 컸다고 하지만, 먼 나주까지 몽진을 떠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며 그만큼 개경 이남에서 고려 조정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실제 몽진길에 나선 현종의 신변을 위협한 이들은 지역의 도적도 있었지만, 호족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는 고려 왕조와 호족 간의 복잡 미묘한 관계로 연결된다. 고려는 태생적으로 호족들의 연합 국가 성격이 강했고 고려 초기까지 호족은 중요한 정치 세력이었다. 그만큼 영향력이 큰 존재들이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각 지역의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29명의 왕후를 두는 적극적인 혼인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유력 호족들과 사돈 관계를 형성하면 그들을 우호세력으로 둘 수 있고 견제하는 효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호족들의 지역에서 자치권을 일정 인정했다. 아직 국가 체제가 완비되지 않았고 그 스스로가 개경을 중심으로 한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으로서는 힘으로 호족 세력을 완전히 제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왕건의 혼인 정책은 사후 왕실 내 치열한 권력 투쟁을 불러왔고 2대 왕 혜종과 3대 왕 정종이 권력 투쟁 과정에서 단명하는 원인이 됐다. 이는 왕권을 흔들리게 했고 그 권위를 잃게 하는 일이었다.
고려 왕조와 호족의 관계가 변화한 건 4대 왕 광종 때였다. 그는 왕권 강화를 강력히 추진했고 이는 호족들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다. 광종은 호족들에 맞설 친위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관리를 시험으로 선발하는 과거제를 도입했다. 과거제 도입과 시행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인 쌍기였다. 광종은 그 외에도 중국에서 귀화한 이들을 등용했다. 이는 고려의 개방성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했지만, 광종의 정치적 의도도 포함된 일이었다. 이를 통해 광종은 호족 세력과의 연결성이 덜한 이들로 조정을 구성할 길을 열었다.
고려 왕조와 호족들의 긴장 관계
또한, 호족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노비 안검법을 전격 시행해 억울하게 호족의 노비가 됐던 이들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조치는 했다. 이는 자영농을 육성해 세수를 확보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노동력이 힘이 원천이 되는 세상에서 호족들의 힘을 빼는 효과가 있었다. 호족들의 노비는 그 자체로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존재였고 유사시 사병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노비의 수를 줄이는 건 호족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와 함께 광종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호족과 그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는 등 공포 정치를 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 호족들이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고 목숨을 잃었다. 이와 함께 광종은 지방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을 파견해 호족들의 장악한 개경 외 지역에 대한 조정의 장악력을 높여갔다.
하지만 모든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고 중요 요충지에만 지방관이 파견됐다. 이에 호족들은 왕에 충성을 하며 중앙 정치에 포함되어 문벌 귀족화되거나 조정의 영향력이 덜한 지방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토호 세력이 됐다.
광종의 강력한 왕권 강화책에도 호족들이 완벽히 고려 왕실에 굴복한 건 아니었다. 조정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서 호족들은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했고 왕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 또한, 광종 이후 고려 왕실의 후계 구도가 정립되지 못하고 혼란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들이 다시 그 힘을 회복하는 모습도 있었다.
신라 후기부터 오랜 세월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역의 정치, 경제 전반을 지배했던 호족 세력의 뿌리는 그만큼 깊고 튼튼했다. 실제 호족세력은 신라가 무너지고 후삼국 시대에 열리고 고려가 건국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족들은 폐쇄적인 골품제에 반발하는 신라 지식인층인 6두품 세력과 연합해 정치 세력화됐고 개인이 참선을 중요시하는 불교의 종파인 선종과 연결됐다.
이를 통해 정치적, 종교적 정통성을 확보했다. 또한, 중앙의 통제가 느슨한 사이 사병을 보유하며 군사 조직화하기도 했다. 아울러 민간에서 유행했던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을 적극 수용해 사상의 다원화를 이뤘다. 이는 천년 왕조인 신라 지배를 벗아나기 위한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고려는 이런 호족들과의 연합 정권이었고 이들의 관계를 보다 수평적이었다. 과거 중세 봉건제와 같이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신 지역의 통치권을 보장받는 봉건제적 성격이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보였다. 즉, 초기 고려 왕조는 호족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왕권 강화의 필요성 절감한 현종의 몽진길
고려 거란 전쟁은 이 관계를 다시 정립하게 했다. 광종 사후 다시 세력을 확장했던 호족 세력들이 전쟁을 거치면서 와해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현종은 전쟁 후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더 강화하고 교과서에서 고려의 지방 행정체제로 나오는 5도 양계의 지방 행정 조직을 시행했다. 이를 통해 고려는 한층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고 중앙 집권적 통치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는 고려 거란 전쟁 당시 험난했던 그의 몽진과 관련이 있다. 드라마에서도 나오지만, 현종은 고려 왕실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지방 호족세력들에게 지속적인 신변 위협을 당하고 있다. 거듭된 전쟁은 분명 호족들에게 경제적 타격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보유한 노비나 사병들이 군대로 차출되고 각종 군수 물자 조달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수 호족들은 지방에서 왕으로 군림하며 일반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어들이고 부를 축적했다. 그 과정에서 중앙의 통제가 미약한 곳에서는 호족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를 알리고 도움을 받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건국 중국의 국가 운영 시스템을 응용한 행정조직을 만들고 유교적 통치 시스템을 만들려 했지만, 지방에서는 호족들을 중심으로 기조의 관습과 상. 하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 틀에서 또 다른 신분 관계가 형성되고 백성들은 2중으로 세금을 부담하고 각종 부역과 군역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현종은 몽진 과정에서 여전히 왕실에 적대적인 호족들의 존재와 그들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의 삶을 몸서 보고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왕조가 스스로 황제국임을 천명하고 자주성을 높였지만, 그 권위가 여전히 지역에서는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현종은 전쟁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현종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강조의 정변을 통해 옹립이 됐고 정통성에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란과 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아직은 그의 권위가 서지 않는 상황이었고 권력 기반도 미약했다. 자신의 신변마저 쉽게 위협받는 상황은 왕권 강화라는 중요한 과제를 그에의 마음속에 각인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몽진 과정을 거친 2차 고려 거란 전쟁은 장기간 전쟁에 부담을 느낀 거란이 고려 현종의 추후 입조 약속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종전됐다. 하지만 거란군의 철군은 기약 없는 친조 약속에 따른 것으로 거란에는 껍데기뿐인 승리였다. 오히려 거란군은 철군 과정에서 여전히 건재한 고려 군의 반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들에 중요시했던 고려인 포로들도 잃었다.
이 과정에서 2차 거란 전쟁의 영웅 양규는 거듭된 유격전으로 수많은 거란군을 섬멸한 데 이어 수만 명의 고려인 포로를 구출하는 전공을 세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분투하던 양규는 거란의 최정예 본대와 맞서 마지막까지 분투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양규 등 고려 장수들과 군대는 총사령관 강조의 부대가 괴멸되고 강조가 사로잡혀 처형되고 왕이 몽진을 떠나는 등 지휘부 공백 속에서도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거란군과 맞섰고 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이는 2차 고려 거란 전쟁을 거란에게 실패한 전쟁이 되도록 했다.
2차 거란 전쟁 후 현종은 거란의 추가 침공에 대비해 강감찬 등의 건의로 군비 증강과 함께 수도 개경을 방어하기 위한 축성과 함께 전후 복구를 진행했고 정치에서도 친정체제 구축을 본격화했다. 이를 위해 그에게 우호적인 신라계 호족들과 관련 인사들을 중용했고 전쟁 장기화 과정에서 그 힘이 비대해진 군부 세력들을 숙청하며 위협 요소를 제거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후 왕권 강화한 현종, 호족의 몰락
3차 고려 거란 전쟁이 일어났던 1019년까지 고려는 전시 체제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상황에서 왕권은 한층 더 강화될 수 있는 환경이었고 그에 반하는 세력들은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당연히 호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앞서 언급한 대로 현종은 중앙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행정체제를 구축하며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호족들의 권위를 격하시켰다. 또한, 국가 통합 차원에서 팔관회와 연등회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숭불정책을 유지하며 민심을 얻는 노력도 병행했다. 이를 통해 고려는 거란의 3차 침공에 완벽히 대비할 수 있었고 완벽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고려 거란 전쟁은 이 점에서 고려 왕조의 기반을 더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됐다. 3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현종은 이전처럼 몽진을 떠나지 않고 얼마 안 되는 병력에도 개경을 사수하는 모습을 보였고 전쟁 승리의 주역이 됐다. 당연히 왕의 권위는 한층 더 높아질 수 있었다. 민심을 얻은 왕의 권위는 호족과의 관계에서 왕권이 완전히 우위에 서도록 했다.
현종 이후 고려가 오랜 평화시기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고려는 문인들이 정치와 국가 운영 전반의 주도권을 잡은 문벌 귀족사회로 발전했고 호족들의 존재감은 한층 더 줄어들었다. 상당수 호족들은 지방관을 보좌하는 향리가 됐다. 이를 통해 고려는 비로소 중앙집권 왕조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고려 왕조와 호족의 관계는 건국초 연합과 협력, 그리고 치열한 권력 투쟁기를 거쳐 고려 왕조의 승리로 결말을 맞이했다.
이 점에서 고려 거란 전쟁은 대외적 측면 외에 고려 정치사적으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런 배경을 사전에 알고 있다면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을 보다 밀도 있게 볼 수 있게 볼 수 있다.
사진 : 드라마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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