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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여 년간 한국 영화의 흥행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은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을 이끌고 무패의 신화를 남긴 영웅이기도 했고 그 삶 자체가 너무나 극적이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이순신은 가장 존경받는 역사 인물로 남아있고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는 여전히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 이순신을 소재로 한 3부작 영화의 마지막 편인 '노량' 지난해 연말 상영을 시작했고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3부작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영화 '명량'은 아직 깨지지 않은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1761만 6141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2014년 7월 개봉한 영화 '명량'은 개봉 당시 인지도 높은 배우들이 대거 주연과 조연으로 캐스팅되며 관심을 모았다. 당시 영화 평론가들은 역사적 고증의 오류와 신파적 전개, 다소 산만한 구성, 전쟁의 참상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슬로비디오 화면을 보는 듯하면서 준 롱테이크 기법을 더한 전투 신 등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이에 영화 평론가들의 평점은 대체로 후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들의 평가는 달랐다.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실감 나면서도 장대한 전투신과 극적인 내용 전개, 이순신이 가지는 영웅의 이미지 등이 더해지며 구름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이순신 영화 3부작의 시작 '명량'


'명량'의 성공은 이순신 시리즈를 지속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순신 시리즈는 '한산', '노량'으로 이어지며 완결할 수 있었다. 이후 작품들은 완성도를 더했고 신파적 요소를 억제하는 등 정제된 모습을 보였다. CG 등 기술의 발전으로 전투신은 보다 더 실감 나고 디테일하게 그려졌다. 이순신 시리즈는 한국 영화의 발전과 함께 했고 관객들은 가면 갈수록 완성도를 더해가는 전쟁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순신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던 영화 '명량'을 10년이 세월이 지나 EBS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EBS가 매주 주말 방송하는 한국 영화 특선을 통해 '명량'을 만날 수 있었다. 2014년 1700만 명의 한 사람으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긴 했지만 안방에서 다시 보는 영화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이미 역사적으로 그 결과를 알고 있고 영화의 내용도 알고 있지만, 다시 보는 '명량'에 이끌렸다. 그 과정에서 10여 년 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영화의 디테일한 부분을 더 살펴 볼 수 있었다.  

'명량'은 1597년 10월 26일 있었던 명량해전을 배경으로 한다. 명량해전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 내용을 알고 있다. 아울러 그 승리가 얼마나 기적적이었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전개를 위해 전투 장면들에서 상상력이 더해졌다고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13척의 함선으로 적게는 130척, 많게는 330척에 이르른 일본 수군을 대승했다. 최소 10배가 넘는 적선을 상대로 한 승리라는 점만으로도 이 해전의 승리는 기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영화 '명량'의 대성공은 이런 기적적 승리를 통쾌하게 재현했기에 가능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더 빛나게 하는 건 이순신의 너무나 극적인 서사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육전에서 일본군에 연전연패하며 큰 위기에 빠진 조선의 희망이었다. 이순신은 누구보다 전쟁에 철저히 대비를 했고 실제 전쟁에서 그 대비는 거듭된 승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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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양상 바꾼 이순신의 존재감 


이순신의 수군은 남해 일대의 재해권을 완벽히 장악했고 일본군의 보급로는 차단했다. 그해 8월에 있었던 한산도 대첩은 조선 수군이 남해바다의 재해권을 완벽히 장악하는 중요한 해전이었고 그 가치는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후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바다에서 활약과 각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이 더해지며 조선은 반격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 수도 한양을 빠르게 점령하고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까지 장악해가던 일본군은 후방 보급로가 차단되고 전쟁이 장기전이 되면서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후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쟁 양상은 완전히 변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후퇴해야 했다. 전쟁은 소강상태를 보였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강화협상이 시작됐다.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강력한 반대와 함께 일본의 무리한 요구는 강화협상을 진전시키지 못했고 일본은 1597년 다시 대규모 침공에 나섰다.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명량'은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정유재란이 시작되는 상황에 이순신은 왕명을 어긴 대역죄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한양으로 압송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원익과 정탁 등 일부 대신들의 적극적인 구명으로 목숨을 보존하긴 했지만, 이순신은 아무 직책도 없이 백의종군하는 처지가 됐다. 

 

 

 




이순신의 파직, 그리고 조선 수군의 몰락


그 사이 이순신을 대신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조선 수군은 조선 조정의 잘못된 상황판과 무리한 출전 요구, 원균의 무능이 겹치며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당하고 수군이 사실상 궤멸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오랜 세월 만들었던 무적의 조선 수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칠천량 해전의 결과는 정유재란에서 일본군이 초반 기세를 올리는 계기가 됐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당시 점령하지 못했던 호남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고 중요 요충지 남원과 전주를 점령하며 빠르게 북진했다. 그와 동시에 일본군은 남부 지방 일대에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그 와중에 목숨을 잃었고 노예가 됐다. 또한, 소중한 문화재와 유물들이 파괴되고 사라졌다. 이전 임진왜란과 비교할 수 없는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다.

일본군은 이 기세를 이어 그동안 이순신에 막혀 하지 못했던 수륙 병진 작전은 적극 추진했다. 일본 수군이 남해안을 돌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일본 육군과 함께 북상하는 전략이었다. 뱃길을 이용하면 조선 수도 한양으로 향하는 시간이 훨씬 단축될 수 있었다. 조선에는 또 다른 위기였다. 조선 조성은 또 한 번의 몽진을 고려할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겨진 함선은 12척뿐이었고 병력이나 물자도 부족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서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이순신은 이를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익히 알고 있었고 수군이 이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결사 항전 의지를 조정에 알리는 한편 일본 수군을 막아낼 전략을 구상했다.

 

 

 




백의종군 뒤 돌아온 이순신에 남겨진 12척의 함선


하지만 의지만으로 중과부족의 상황을 이겨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수군의 궤멸, 호남 지역을 일본군이 장악하면서 언제든 일본군이 수군 본영을 공격해 올 수 있는 상황에 수군은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 하는 지역 백성들에게는 큰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게 했다. 크게 불리한 전력에 마음에서부터 패배를 예감하는 상황에서 전투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순신 역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황이었다. 이미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생활했던 그였고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전투를 계속했던 그였다. 전투 과저에서 적의 총탄에 부상을 입기도 했었다. 또한, 당시로는 많은 50살이 넘은 나이였다. 아마 이순신은 극도의 고통 속에 전투를 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조선 임금 선조는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도 그의 품계를 다시 높이지 않았다. 상당수 수군 장군들이 이순신과 같은 품계가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이순신이 가뜩이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수군을 지휘하는 데 있어 큰 어려움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이순신은 개인적으로도 비극이 전쟁 중에 있었다. 그의 막내아들은 일본군의 보복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는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에 나선 이순신을 만나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다 객사했다. 그는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을 전장에서 들어야 했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가장 큰 시련기에 맞이한 일로 그를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리게 할 수 있었다. 그 시기 이순신은 삶의 의지를 놓을 수도 있었고 이런 상황으로 그를 이끈 전쟁 상황, 또한 조정과 임금 선조에 대한 원망과 분노까지 여러 복잡한 감정 속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쉽게 평정심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영화에서도 이런 이순신의 인간적 고뇌를 순간순간 장면들을 통해 묘사했다. 그 역시 사람이었고 계속되는 불행 속에 마음이 흔들릴 수 있었다. 두려움 또한 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초인적인 의지로 이를 극복하고 전투에 집중했다. 

 

 

 




열악한 전쟁 상황, 개인적인 불행을 모두 극복해야 했던 이순신


이순신은 수군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전투에 나섰다. 실제 역사에서 명랑해전 당시 이순신의 함선이 최 일선에서 전투를 하는 와중에 다른 함선들은 먼발치에서 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대규모 일본 함대의 기세에 눌린 다른 장수들은 쉽게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대장선의 수 시간을 버티며 일본 함대를 격파하자 하나 둘 전투에 참여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상세히 그려냈다. 영화에서는 일본 수군의 공격에 백병전이 펼쳐지는 등으로 묘사됐지만, 실제 전투에서 이순신의 함대는 해전이 있었던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수로인 울돌목의 빠른 해류와 시시각각 변하는 해류의 방향, 지형지물 등을 이용해 대응했다.

또한, 함대의 규모를 속이기 위해 지역 어민들의 배를 이용해 함대의 규모를 보다 많게 보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기에 과거에는 설화 등으로 치부됐던 긴 쇠사슬을 이용해 일본 수군을 교란했다는 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 수군은 수백 척의 대형 함대였지만, 좁은 수로로 대거 밀려들면서 함대가 뒤엉키는 상황이 생겼고 이순신 함대의 효과적인 포격에 파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조류가 방향이 일본 수군 쪽으로 변하는 시점에 이순신은 함대의 돌진을 명했다. 조선 수군의 함선인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배보다 더 크고 높았고 단단했다. 직접 충돌을 하면 일본 함선들은 부서지곤 했다. 이를 이용해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일본 함선을 충돌하는 총파 공격을 단행했다. 마치 거북선의 재현과 같았다.

실제 거북선은 기존 판옥선을 바탕으로 그 위에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날카로운 못을 씌운 철판 지붕을 씌운 구조였다. 여기에 적에게 공포감을 주는 용머리를 부착한 돌격선이었다. 비록, 명량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없었지만, 이순신의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그 이상의 효과를 얻었다. 

이런 전략적인 대응과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조선 수군의 기세에 일본 수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선봉장이 전투 도중 전사하는 상황이 겹치면서 그들의 사기는 더 떨어졌다. 어느새 전세는 10여 척의 조선 수군이 수백척의 일본 수군을 추격 타격하는 양상으로 변했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명량해전 승리로 다시 위기의 조선 구한 이순신


명량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의 수륙 병진 작전은 다시 좌절됐다. 당연히 이순신의 수군에 대한 공포심도 더해졌다. 이는 육지전의 흐름도 변화시켰다. 이미 조선 수군의 위력을 실감했던 일본군은 다시 한번 북진 시 보급로 차단의 가능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역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상비군을 다수 육성하는 등 전쟁에 대비한 상황이었다. 명나라 군도 다수 참전해 전투에 임했다. 명량해전을 기점으로 일본군의 기세는 꺾였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수성전을 전개했다. 

이후 전쟁은 조. 명 연합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일본군을 함께 압박하며 공. 수가 전환됐다. 이 점에서 명량해전의 가치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한산도 대첩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순신 영웅 스토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이순신은 빠르게 수군을 재건했고 남해안 재해권을 장악했다. 

이런 이순신의 영웅 서사에서 빠지면 안 되는 요소는 백성들이었다. 영화 말미 이순신은 승전과 관련해 아들과 함께 얘기하면서 천행이라 했다. 이를 두고 해류의 흐름이 조선 수군에 극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는 백성들의 참전이라 했다. 영화에서 백성들은 한없이 약한 존재로 보였지만, 이순신의 분전을 보고 전장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위기의 이순신 함선을 극적으로 구해내기도 했다. 이런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전은 승전의 중요한 요인이 됐다. 

이는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진 장면들이지만, 실제 이순신이 무패의 수군을 만드는 데 있어 지역민들의 헌신이 큰 힘이 됐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다. 군대에 있어 적절한 보급과 군수 지원은 강군의 필수조건이었다. 전쟁 상황에서 중앙 정부의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없었던 전장에서 이순신은 수군 본영에 둔전을 조성하고 지역민들과 피난민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했다. 이는 군대의 군량미 등으로 충당될 수 있었고 지역민들에도 유용한 양식이 될 수 있었다. 

조선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인 이순신의 수군 함대 주둔지에는 당연히 백성들이 많이 몰리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그들에게 삶을 터전을 제공하고 동시에 군수 지원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순신은 군인이기도 했지만, 행정가의 면모도 보였다. 당연히 지역의 민심이 그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의 다양한 면모를 살필 수 있었던 영화 '명량'의 N차 관람


즉, 이순신의 승전에는 군인으로서의 리더십과 전략가의 면모 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싸운 병사들, 그리고 이름 모를 백성들의 피와 땀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이순신이 대단한 건 승전의 장군 이전에 전쟁에 승리할 수 있도록 가용한 역량을 모두 담아낸 통합의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그에 근거한다 할 수 있다. 

다시 TV를 통해 본 영화 '명량'은 이순신 영화 시리즈를 다시 추억하게 하는 한편 이순신이 우리 역사에서 가진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아울러 발전하는 한국 영화의 한 단편도 살필 수 있었다.

EBS에서는 매주 다양한 영화를 방영하고 있다. 그 속에는 추억의 우리나라와 외국의 영화까지 다양한 영화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 안에서 명화를 다시 보고 느끼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특히, 한국 영화 특선은 지금은 톱 스타가 된 배우들의 초창기 모습을 살필 수도 있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영화의 또 다른 면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영화 N차 관람이 보편화된 요즘, EBS 영화는 돈 들이지 않은 N차 관람을 가능하게 하는 매력도 있다. 영화 '명량'은 10년의 세월을 넘어 N차 관람을 경험하게 해준 색다름의 시간이었다. 


본 게시글은 EBS 18기 스토리 기자단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진 : EBS / 영화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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