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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드라마로서는 모처럼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고 고려 거란 전쟁이 16화를 끝으로 2차 고려 거란 전쟁을 마무리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드라마는 강종의 정변을 시작으로 이로 인해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천추태후의 몰락, 그의 아들인 목종의 폐위와 피살, 현종의 즉위까지 빠른 전개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의 면면이 드러나고 당시 북방의 강대국 거란과의 갈등이 고조되는 장면을 더했다. 993년 1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국교를 맺고 사대 관계를 형성한 고려와 거란은 평화 시기를 보냈지만,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고 고려 왕이 거란 왕의 책봉을 받게 됐지만,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신, 고려는 중요한 요충지인 지금의 강동 6주를 영토에 포함시킬 수 있었고 이 지역을 요새화하며 거란의 재침에 대비했다. 또한, 거란의 요청대로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긴 했지만, 비공식 교류를 지속하면서 거란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에 거란은 그들에게 완벽하게 굴복하지 않는 고려 정벌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거란의 왕이 된 성종은 어머니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는 거란 역사에서 성군으로 기록된 인물이었고 거란 역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런 거란으로서는 고려의 존재가 거슬릴 수 있었다. 아울러 송나라에 대한 공략을 보다 본격화하기 위해 배후에 자리한 고려를 완벽하게 자신의 영역에 포함할 필요도 있었다. 

 

 

문경 드라마 세트장

 



고려 조정의 혼란 속 일어난 2차 고려 거란 전쟁


이런 평화와 전쟁의 줄타기기 지속하는 가운데 고려에서 일어난 강조의 정변은 거란에게는 중요한 침공의 빌미가 됐다. 거란은 그들이 책봉한 고려 왕의 폐위와 피살이 고려의 거란에 대한 사대에 있어 중요한 결격 사유가 됐다. 이에 거란은 역적 강조를 벌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침공을 단행했다. 1010년 2차 고려 거란 전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내면에서 고려에 대한 완벽한 정벌, 고려가 차지한 중요한 요충지 강동 6주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오기 위한 영토 분쟁이 중요한 이유였다. 강동 6주는 송나라와 그들의 배후에 자리한 또 다른 북방민족 여진을 동시에 견제하고 동북아시아 일대의 교류와 무역을 통제하고 중계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1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거란은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면서 서경 이북의 영토가 그들의 영토임을 주장한 바 있다. 

이렇게 2차 고려 거란 전쟁은 양국의 국. 내외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전쟁의 초반 양상은 고려에 불리했다. 고려는 서북면을 책임지는 도순검사 양규를 중심으로 한 고려군은 거란의 대군을 치열한 공성전을 통해 효과적으로 막아냈고 그들의 진격을 늦추는 데 성공했다. 고려가 승기를 잡을 것으로 보였던 전쟁은 정변 이후 최고 권력자가 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이 거란군과의 결전에서 대패하면서 반전됐다. 

거란은 서북면의 고려 방어선을 돌파하는 대신 고려 수도 개경을 직접 공격해 고려 왕 현종을 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으로 급선회했다. 이를 위해 거란군은 기마 병력을 중심으로 빠른 기동전을 전개했다. 그들을 상대로 강조는 벌판에서 강대강의 대결을 선택했지만, 진영의 약점이 노출되면서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고려는 중요한 방어선이 붕괴됐고 총사령관인 강조가 거란에 사로잡혀 처형되는 피해가 더해졌다.  그가 비록 정변을 일으킨 인물이긴 했지만, 그는 고려군의 구심점이었다. 그가 사라진 고려군의 지휘체계는 무너졌고 사기 또한 저하됐다. 다행히 동북면의 군대가 서북면을 지원하고 서경을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긴 했지만, 개경으로 향하는 거란군을 제어하기는 무리였다. 

 

 




서북면 고려군의 선전에도 함락된 수도 개경


이미 대부분의 군대를 서북면으로 보낸 고려는 수도 개경으로 향하는 거란군을 막아낼 병력이 많지 않았다. 또한, 개경은 평지에 위치해 있었고 수도를 지킬 성벽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수도 개경의 함락은 필연이었다. 왕의 안위까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왕이 국가인 당시 상황에서 왕의 신병을 거란이 확보한다면 고려는 재기 불능의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고려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항복과 항전 중 하나였다. 

1차 고려 거란 전쟁때도 항복론이 우세했지만, 서희를 중심으로 한 항전파가 협상을 시도했고 전쟁을 피하고 실리를 얻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당시는 거란이 전면전보다는 고려와의 외교관계 수립을 우선한 침공이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고려 정벌을 꿈꾸는 거란에 1차 고려 거란 전쟁과 같은 협상은 불가능했다. 완전한 항복과 강동 6주의 할지 등이 필요했다. 

여기서 고려는 항전을 택했다. 서북면의 고려군이 아직 건재하고 거란이 개경 이남의 고려 영토를 잘 모른다는 점, 긴 원정으로 거란군이 지쳐있고 보급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고 가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고려 현종은 항전론에 힘을 실었고 급히 몽진길에 나섰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 호족들의 영향력이 큰 상황이고 상당수 호족이 고려 조정에 부정적인 상황에서 중앙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전쟁 중 긴급한 몽진길은 신변의 위협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고려 현종은 그를 추격하는 거란군의 추격과 호족들의 위협 등을 극복하며 나주까지 몽진을 떠나야 했다. 

드라마에서도 현종의 힘겨운 몽진길을 조명하기도 했다. 실제 역사에서 현종은 수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몽진 도중 수행원들이 도주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를 호위하는 지채문 등 장수들의 헌신과 그에게 호의적인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나주까지 향할 수 있었다. 

현종의 몽진,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도주는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 거란은 애초 계획했던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고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이대로라면 고려에서 스스로가 고립될 수 있었다. 거란의 상황을 고려는 읽고 있었다. 고려는 현종의 향후 친조를 명분으로 화친을 요청했다. 거란으로서는 진정성 없는 요청임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어려웠다. 결국, 거란은 철군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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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개경, 험난한 몽진길에 오른 고려 현종 


개경까지 점령했던 거란군은 개경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또한 수많은 고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거란으로 향했다. 고려 왕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궁궐도 불탔다. 고려는 거란의 남진을 막고 전쟁을 멈추긴 했지만, 치명적 피해가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드라마는 강감찬의 역할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고려사에서 강감찬은 지속 항전과 현종의 몽진을 주장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이후 행적은 남아있지 않다. 현종의 몽진길을 수행한 이들과 관련한 기록에도 그는 없다. 아마도 전장에서 계속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는 강감찬이 거란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거짓 화친을 주도하고 거란의 총사령관 소배압과 비밀 협상을 통해 고려왕의 친조 요청과 철군을 맞바꾸는 일종의 거래를 한 것으로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강감찬보다는 거란군에 마지막까지 맞서 싸운 고려 장수들의 활약에 더 주목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과 관련한 사료에서도 고려 장수들의 활약이 크게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양규다. 그는 서북면 방어를 책임지는 도순검사로 최 전방의 흥화진에서 거란 대군의 공세를 일주일까지 막아내며 그들의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 

이후 총사령관 강조가 전투에 피해 처형되는 등 고려군 전열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서북면 일대의 고려 군을 결집시키고 거란군의 후방을 지속 공격했다. 특히, 거란군이 보급 기지로 삼았던 곽주성을 1700여 명의 병사로 공격해 성안의 거란군을 궤멸시키면서 거란군에 치명타를 날렸다. 이는 거란군이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고 고려군의 위협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이런 양규의 활약은 거란군이 철군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유였다. 

 

 

 




양규의 분전으로 반전된 전세 그리고 장렬한 전사 


양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철군하는 거란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게릴라 전을 전개하며 피해를 가중시켰다. 고려사에서 양규는 7번을 싸워 모두 승리했고 그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다고 했다.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양규는 3만여 명의 고려인 포로들을 구출했다. 고대 전쟁에서 포로는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중요한 전리품이었다. 북방 유목 민족인 거란으로서는 인적 자원 확보가 중요했고 고려 포로들이 소중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방비도 철저했다. 하지만 양규와 그의 결사대의 활약에 거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거란군은 철군 과정에서 피해가 누적됐다.

이런 양규의 활약은 전쟁의 막바지 큰 위기에 봉착했다. 양규의 결사대는 거란 성종의 주력군과 맞서게 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용맹한 그들이지만, 그들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거란군과의 정면 대결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양규와 공신으로 이름을 올린 김숙홍을 포함한 결사대는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을 지속했고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드라마에서도 그들의 장렬한 최후를 긴 시간 조명했다. 양규와 김숙홍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다. 고려사에서 양규와 김숙홍은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항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양규의 김숙홍 그리고 여타 고려 장수들의 활약은 고려에게는 너무나 암담했던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국가의 자존감을 세우고 고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소수의 병력으로 거란의 대군에 치명적 피해를 안겼다는 점은 향후 전쟁에 대한 자신감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일설에는 당시 고려군의 반격에 전쟁을 함께 수행한 거란의 문신들 상당수가 사망하면서 거란 조정 운영에도 큰 어려움이 생겼다는 주장도 있다.

드라마에서는 제작비의 한계 등으로 고려군의 반격과 관련해 양규를 중심으로 화면이 구성됐지만, 고려군의 반격은 기록 그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 후 양규와 김숙홍은 중요한 공신이 됐고 역대 고려 왕조 내내 칭송을 받았다. 조선에서 집필한 고려사에서도 그가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그의 당시 전공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양규는 임진왜란 당시 위기의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과도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다. 고려 거란 전쟁에서 강감찬만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현실에서 양규의 재 조명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재조명되어야 할 또 다른 인물 하공진


그리고 새롭게 조명해야 할 인물이 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사신으로 거란의 철군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 하공진이 그 주인공이다. 하공진은 당시 고려왕의 친조가 담긴 표문을 거란 왕에게 전달했고 그를 설득했다.

하공진은 전쟁 전 동북면 일대를 수비하는 장수였지만, 귀순하는 여진족들을 참살한 일로 인해 파직된 상황이었다. 이후 2차 고려 거란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면되어 전장으로 향했다. 그는 전장으로 향하는 도중 고려 현종의 몽진 소식을 듣고 그의 호위에 동참했다. 그런 그가 사신을 자청했다. 왕고 조정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지도 몰랐던 그였지만, 나라의 위기에 스스로 위험을 자초했다. 

하공진은 고려왕이 이미 멀리 남쪽으로 몽진을 떠났음을 강조하며 거란군의 남진 의욕을 잃게 했다. 고려사에서 당시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 거란군의 선발대가 개경 인근에 도착했을 시점에 고려 현종의 몽진 일행은 그들과의 거리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대로 거란군이 남진을 지속했다면 현종은 거란군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다. 그 시점에 하공진이 사신으로 나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공진은 장수였지만, 문무를 겸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거란 전쟁의 영웅 강감찬도 애초 문신이었음을 고려하면 당시 고려는 문신이 무관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양규 역시 관직의 시작은 문관이었다. 하공진은 장수 이전에 충분한 지식을 쌓은 인물이었고 이는 사진으로서 협상에 있어 장점이 될 수 있었다. 

결국, 추가 남진을 포기한 거란은 철군을 결정했고 하공진은 인질로 그들과 함께 거란으로 향해야 했다. 거란 성종은 인질로 함께 온 하공진의 능력을 인정했고 그에게 거란의 관리로서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한 명의 인재가 아쉬운 거란으로서는 학문적 소양을 갖춘 하공진이 필요했다. 

하지만 하공진은 고려인으로서의 자존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이를 발각한 거란 성종은 그를 거란 여인과 혼인시키고 지속 감시토록 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마음을 돌려 거란의 관리로 일할 것을 종용했다. 만약 다시 탈출을 시도하고 발각이 된다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하공진은 포기하지 않았고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를 위해 날쌘 말을 그의 탈출로 곳곳에 미리 배치하는 사전 작업도 했다. 이런 하공진의 시도는 다시 발각됐고 하공진은 거란 성종의 문초를 받았다. 거란 성종은 마지막까지 그가 마음을 돌리길 기대했지만, 하공진은 강하게 반발했고 고려인으로서의 적에게 굴복할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했다. 

 

 

귀주대첩도 - 위키백과

 




2차 고려 거란 전쟁,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지켜진 고려 


이에 분노한 거란 성종은 하공진의 처형을 명했다. 역사서에서는 분노한 거란 성종이 그의 내장을 꺼내 먹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하공진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고려인으로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런 하공진의 영웅적인 면은 앞으로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에서도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양규와 함께 그의 이름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2차 고려 거란 전쟁은 고려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 끝내 침략자에 굴복하지 않았고 나라의 자주성을 지킬 수 있었다. 거란은 왕이 직접 나선 전쟁에서 큰 성과 없이 철군해야 했다. 이 전쟁은 고려 내부의 정치적 격변기와 맞물리며 고려에 큰 위기가 됐지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이후 고려는 현종을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했고 국력을 하나로 모아 거란의 침략에 맞설 수 있었다.

이는 3차 고려 거란 전쟁의 대승으로 연결됐고 고려는 송과 거란과 대등한 위치에서 동북아시아의 중요 국가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런 결과는 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 고려가 끝까지 항전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항전의 중심에는 양규와 김숙홍 그리고 하공진과 같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이 있었다.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이런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드라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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