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역사에 있어 몽고와의 전쟁은 사상 유례없는 장기간의 투쟁이었다. 당시 아시아는 전체는 물론이고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치던 몽고군은 세계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이 침공한 나라는 예외 없이 굴복당했다. 하지만 고려는 30여 년을 버티며 그들과 맞섰다. 하지만 긴 전쟁으로 인해 일반 백성둘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 몽고군의 약탈과 노략질에 전 국토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고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고려는 장기간의 전쟁을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몽고군이 육지에서 세계 최강이지만, 해전에 약하는 점을 이용한 결정이었다. 강화도에 자리한 고려 정부는 대몽 전쟁을 이끌었다. 문제는 강화도 고려 정부가 민생을 외면한 그들만의 삶을 영위했다는 점이..
드라마 임진왜란 1592, 5회는 임진왜란이 후반부를 다루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조선은 나라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몰렸다. 왕을 비롯한 집권층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북으로 피난 가기에 급급했다. 왕은 명나라 망명을 고려하기에 이르렀고 백성들은 침략군의 약탈과 노략질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됐다. 조선에서의 손쉬운 승리에 일본은 기세를 몰아 조선을 넘어 명나라로의 진격을 현실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생각지 않았던 변수가 등장했다. 우선 바다에서 이순신의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며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육지에서는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이 그들을 괴롭혔다. 조선의 북쪽 깊숙이 진격한 일본군은 군수물자 부족은 물론이고 식량난에 시달리며 사..
지난 1, 2, 3회를 통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가 함께하는 팩츄얼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로 임진왜란을 조명했던 드라마 임진왜란 1592, 그 네 번째 이야기는 명나라의 참전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전쟁 전 명나라를 비롯한 조선, 일본의 상황과 전쟁 후 명나라의 참전 과정, 명나라군이 참여했던 대표적 전투인 평양성 전투가 주 내용이었다. 그 속에서 명나라의 참전 배경과 한.중.일의 역학관계가 함께 조명됐다. 임진왜란 발발의 주요 원인은 알려진 대로 일본을 통일한 실력자 토요토미의 야욕이었다. 도요토미는 일본을 통일하긴 했지만, 여전히 지방의 실력자들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힘으로 누를 수 없었던 상황에서 토요토미는 일본을 벗어나 외부로 눈을 돌렸다. 도요토미는 집권 이..
세종의 수레가 부서지는 사고는 역모죄로 비화했다. 수레 제작을 주도한 장영실은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모든 정황은 그가 누명을 쓴 것이 분명했지만, 그에 앙심을 품고 있던 사대부들의 탄핵여론은 세종은 강하게 압박했다. 세종과 그를 따르는 일부 사대부들이 장영실의 구명을 위해 고심했지만, 장영실은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죽음을 택했다. 누구보다 장영실의 진심을 잘 아는 세종은 장영실을 버릴 수 없었다. 장영실은 백성들을 삶을 이롭게 하려는 세종의 정치 철학을 상징하는 어쩌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자를 반포하고 격물 진흥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사대부 세력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이런 세종에 사대부 세력은 장영실이 업적을 담은 역사기록까지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정치..
세종과 장영실이 주도하는 격물 진흥 정책의 성과는 눈부셨다. 조선은 더는 명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천문 연구가 가능해졌고 다양한 발명품들은 백성들의 삶을 더 풍요롭 게 하는데 이용됐다. 특히,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의 보급은 상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이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격물 연구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기득권 세력인 양반 사대부들의 반대는 커져만 갔다. 세종을 중심으로 한 열린 사대부 세력들이 격물 진흥 정책을 뒷받침했지만, 대다수 사대부들에게 격물진흥은 체제를 위협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흔들게 하는 일로 여겨졌다. 실제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진다면 이와 비례해 지식의 습득이 보다 쉬워질 수 있고 이는 사대부들이 독점..
격물 진흥 정책을 위해 던진 세종의 승부수가 적중했다. 세종이 공언한 대로 장영실과 서운관 관리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일식의 일지와 일시는 정확히 예보했다. 세종은 역대 가장 정확한 시간에 구식례를 거행할 수 있었다. 이로써 격물진흥 정책에 대한 조정의 반대 여론은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추가적인 격물 진흥 정책도 탄력을 받게 됐다. 이 과정에 큰 위기가 있었다. 누적된 기록 부족으로 고심하던 장영실과 학자들은 일식 일자는 예보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일시는 쉽게 예측할 수 없었다. 이들은 과거 조선 비밀 천문연구과정에서 작성된 기록을 떠올렸다. 그 기록은 당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장희제에 의해 보관되어 있었다. 장희제는 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그 기록을 가지고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