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물건을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여기에 천문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이는 그의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장영실은 부친 장성휘는 고려 때부터 기술직 관리로 능력을 인정받았고 천문과 관련한 일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는 천문 과학자였다. 왕조가 바뀌었어도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성휘는 고려가 이후 등장한 조선왕조에 협력하고 않았고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기생있었던 장영실의 모친을 만났고 장영실을 낳았다. 분명 장영실은 양반의 자손이었지만, 부모 중 한명이라도 천민이면 그 자녀 역시 천민이 되는 제도에 얽매여 관청의 노비로 살아야 했다. 당시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유물이나 재산으로 취급됐다. 그런 노비에게 일 외에 다른 분야에 대..
우리 역사에서 세종대왕은 최고의 성군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세종시대 조선은 창업 초기 혼란기를 극복하고 전성기를 열었다.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을 모두 섬멸할만큼 강력한 국방력을 구축했고 민생은 안정됐다. 국가 시스템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학문과 문화, 과학기술은 발전은 눈부셨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한글 창제는 최고의 업적 중 하나였다. 조선은 이후 성종 대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열어갈 수 있었다. 이런 조선 시대 세종대의 영광은 세종대왕의 영민함과 애민정신, 강한 추진력 등이 큰 요인이었지만, 이런 그의 정책을 뒷받침했던 이들이 있어 가능했다. 그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철혈 군주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왕권에 위협되는 세력을 철저히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공신세력과 외척 ..
최근 뉴스를 살펴보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이슈 중 하나가 바다와 관련한 영토분쟁이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독도를 둘러싼 공방이나 중국과 일본, 미국, 동남아 국가까지 엮여있는 남중해 문제도 풀리지 않는 갈등 중 하나다. 과거에는 우리가 밟고 사는 땅과 관련한 영토분쟁이 주를 이루었던 것과는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만큼 해양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해양에는 육지에서 고갈되어 가는 각종 자원이 풍부하고 해상을 이용한 안정된 운송로 확보를 위해서도 해양영토의 확보가 중요하다. 강대국들이 해군력 증강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 있다. 이런 주변국들의 해양영역 다툼 틈바구니에서 우리도 고군분투중이지만, 힘의 한계를 느낄 수..
얼마 전 TV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우리에게 아직 멀기만 제국 발해에 대해 다뤘다. 멸망하 고구려를 계승하고 그들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에 대한 이겨기는 마음을 뜨겁게 했지만, 이후 우리 민족에서 만주 지역이 남은 땅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만주 지역은 과거 요동, 요서라 불리던 곳으로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이었다. 특히, 삼국시대 고구려는 이 지역을 근거지로 중국의 대제국과 당당히 맞서며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고 주변 이민족들을 지배하는 제국의 면모를 갖췄다. 이런 고구려가 중국 통일 왕조에는 눈엣 가시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신흥 제국 당나라와 신라의..
푸르미 사측의 집요한 노조 파괴작업은 급기야 폭력사태까지 초래했다. 황주임에게 인격 모독을 서슴치 않으며 집요하게 괴롭히던 신임 과장은 언행에 황주임은 평정심을 잃었다. 황주임과 신임 과장은 충돌이 빚어질 위기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황주임의 절친 주주임은 신임 과장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말았다. 이는 사측에서는 노조를 공격할 중요한 빌미가 됐다. 사내 폭력사태의 책임을 물어 사측은 주주임에게 해고를 황주임에 정직 처벌을 했다. 가뜩이나 노조활동이 어려움에 봉착한 상황에서 푸르미 일동점 지부장 황주임의 해고는 큰 타격이었다. 황주임은 노조원들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고 흔들리는 노조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비열한 방법까지 동원한 사측의 처사에 이수인은 파업결행을..
푸르미 사측의 방해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준법 투쟁으로 맞섰던 푸르미 일동점 노조원들은 노력의 성과물이 나오지 않으면서 점점 지쳐갔다. 이는 노조를 이끌고 있는 이수인을 비롯한 집행부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사측이 노조활동시간에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하며 노조원들의 급여를 대폭 삭감하고 노조원들을 겨냥한 징계와 고소, 고발을 남발하자 상황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당장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노조원들이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조원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노조 집행부와 그들을 따르는 이들이 싸울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노조에 가입하고 탈퇴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노조원들의감정은 더 상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