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 러시아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전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수개월간 지속된 전쟁에서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했고 그 피해는 누적되고 있다. 전쟁의 참상이 시시각각 전해지면서 침략자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의 지도자 푸틴에 대한 분노도 커지고 있다.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들은 대 러시아 경제제제를 강화하며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대한 군사적, 인도적 지원을 지속하고 있다. 개전 초기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침략자와 맞섰고 많은 곳에서 러시아의 공세를 이겨내며 영토 밖으로 러시아 군대를 밀어내는 성과를 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는 거의 정상을 회복하고 있다. 이에 러시아는 공세의 초점을 ..
1776년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한 13개 주가 모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며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끊임없는 개척의 역사이기도 했다. 대서양 연안에서 미국은 점점 서쪽으로 그 영토를 확장했고 마침내 태평 연안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은 북극권의 알래스카와 태평양의 섬 하와이까지 그들 영토에 포함하면서 미국 국기 속 별 개수와 같은 50개 주로 이루지는 광대한 영토의 미합중국을 이뤄냈고 세계 최강국이 됐다. 이런 영토 확장의 역사에서 많이 나오는 말이 개척정신, 프런티어 정신이다. 새로운 땅을 찾아 그 땅을 개척하는 건 건국 이후 미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사명이었다. 과거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 개척지인 미국 동부 해안에 터전을 잡은 이후 미국은 신대륙에서 그 영역을 넓히고 고도의 민주주의 체..
프랑스와 잉글랜드(영국)의 100년 전쟁은 말 그대로 대를 이어 지속된 양국의 전쟁이었다. 주로 프랑스 영토를 전장으로 해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이어진 전쟁은 봉건제를 기반으로 하는 중세 시대의 쇠퇴와 종말과 근세로의 이전, 중앙집권 국가의 성립, 프랑스의 잉글랜드의 국가 정체성 확립 등을 불러온 세계사적으로 그 의미가 큰 전쟁이었다. 그리고 잔다르크라는 프랑스의 영웅이 탄생한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은 발단은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양국 왕가의 갈등이었다. 1328년 프랑스의 왕 샤를 4세가 그의 뒤를 이을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난 이후 새로운 왕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차기 왕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샤를 4세의 조카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 샤를 4세의 사촌이 되는 필리프 6세였다. 잉..
흔히 고대 역사를 배우면서 청동기 시대를 기점으로 신분제가 만들어지고 사회 계층이 생겨났다고 배운다. 신석기 시대 농경이 시작되고 그에 따른 잉여 생산물 발생, 그에 따른 경제력 차이가 부의 불균형을 만들었다. 더 많이 가진 자가 그보다 못한 자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하층민이 된 이들은 노예가 됐다. 여기에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국민들 상당수도 노예로 전락했다. 노예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재산, 가축처럼 취급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임이 부인되는 노예에게 인격이 있을 리 없었고 인간으로서의 기본권 역시 인정되지 않았다. 노예는 소유의 대상이었고 양도, 매매의 대상이었다. 그 노예의 삶은 보통 대를 이어 세습됐고 그 굴레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인류 공통의 ..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이 국제 정세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가장 큰 긴장 속에 있는 지역은 중동이다. 특히, 이스라엘과 그 안에 자리한 팔레스타인과의 갈등과 유혈 충돌의 소식은 끊이지 않고 국제 뉴스면을 채우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같은 땅에 살고 있지만, 내전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이 피 흘리며 사라졌다. 피의 보복은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낳고 누군가 흘린 피를 또 다른 피로 씻는 참혹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비극적 관계는 굴곡진 현대사, 그리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잉태됐다. 역사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과 반목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스라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나라는 진시황제의 진나라다. 그 진나라의 이름은 지금 중국을 부르는 영어 이름 차이나의 근원이기도 하다. 진시황제는 최초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게 했고 통일 왕조에 걸맞게 각 지역별로 달랐던 각종 제도와 도량형, 문자, 사회 시스템을 통일하며 중국을 하나의 문화권과 경제권, 행정권 속에 포함토록 했다. 진시황제의 무리한 토목공사와 법가 사상에 근거한 지나치게 가혹한 법의 통치에서 파생된 폭정으로 인해 진시황제에 대한 휴대의 평가는 부정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의 중국을 만드는 데 있어 그의 업적은 매우 크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 후 각 지역을 연중 순시하며 업무를 보고 쉬지 않았던 지독한 워크홀릭이기도 했다. 그는 그만큼 능력도 있었고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