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은 깊은 산중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실제 제천은 면적의 70% 이상의 산지로 이루어진 산악지형이다. 그 때문에 외지인들이 쉽게 찾기 힘들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대신 제천은 청풍호반의 멋진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어 찾기 어렵지만,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13회에서는 이 제천을 찾아 그곳의 멋진 자연과 남모를 사연을 가진 이웃들을 만났다. 여정의 시작은 KTX 역이었다. 제천은 KTX 고속 열차를 타고 찾을 수 있었다. 청량리에서 고속 열차를 타면 1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제천이었다. 멀었던 마음의 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이런 접근성의 향상은 제천의 멋진 자연경관을 찾으려는 이들의 발걸음을 한결 더 가볍게 해주고 있었..
제5공화국 시절의 사건 사고를 되짚어가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04회에는 1983년 10월 온 국민을 슬픔에 빠뜨렸던 아웅산묘소 테러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으로 밝혀진 이 사건은 장기간의 해외 순방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의 암살을 목적으로 실행되었지만, 전두환은 암살을 모면했다. 대신 고위 관료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큰 인명피해가 있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해외 순방 외교 중 테러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대통령 전두환은 1983년 10월 장기간 일정으로 인도와 스리랑카 등 서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을 포함한 해외 순방을 했다. 이는 그동안 우리나라와 큰 교류가 없었던 제 3세계 ..
경기도 연천군은 휴전선과 인접하고 있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곳으로 오랜 기간 여겨졌다. 남북 대치의 상황에서 연천은 도시화와 산업화의 흐름과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은 연천이 그 어느 곳보다 자연이 더 잘 보존되고 오래된 유적들이 그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이 됐다. 연천은 과거 구석기 시대 유물과 유적부터 고구려 성곽, 더 고대의 지질 유적까지 고대의 역사를 품고 있다. 연천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터전을 잡았던 곳이었다.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은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임진강과 한탄강의 물줄기는 그 근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남측 변방으로 그들의 안위를 책임지는 중요한 요지였다. 이런 연천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시대의 흐름과 다소 동떨어진 위..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민족의 비극 6.25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함께 인적, 물적 피해를 남기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통해 비극의 시간을 멈췄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종전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당시 휴전 협정은 종전이 아닌 잠시 전쟁을 멈추는 휴전이었다. 이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엄청난 군사력으로 대치중이고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지속됐다. 같은 민족이지만,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를 적대시하며 살아가고 있다. 6.25 한국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던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의 냉전체제는 그중 하나인 소련의 붕괴와 공산주의 붕괴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철 지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논쟁이 우리 사회 상당 부분을 지..
1982년 3월 27일 이날은 우리 스포츠사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이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프로스포츠 리그인 프로야구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전은 프로야구 출범에 따른 기념식을 겸했고 프로야구 구단 선수들이 모두 참여했다. 큰 관심 속에 1982년 시작한 프로야구는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역사 저널 그날 302회에서는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문화, 스포츠 정책을 재조명했다. 프로야구 출범에 대한 시도는 1970년대 이미 있었다. 재일 동포 사업가의 제안으로 논의가 있었지만,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다. 프로 스포츠가 출범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고 여론의 관심도 크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1..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97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민주주의 발전과 연결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이 사건은 발생 당시부터 오랜 세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광주사태라는 말이 더 일반적이었다. 당시 광주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있었다는 정도가 알려진 사건의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민주화가 촉진되고 군사정권이 그 막을 내린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당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에 저항한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재평가되었다. 또한, 유혈 충돌의 내용 역시 광주지역에 진입했던 계엄군에 의한 무차별적인 무력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