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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축구팬들을 잠 못 들게 했던 대회가 있었다. 2023년 5월 20일부터 6월 11일까지 지구 반대편 남미 대륙 아르헨티나에서 열렸던 FIFA U-20 남자 월드컵이 그 대회였다. 이 대회에 출전한 대표팀은 약체라는 평가를 뒤집고 4강 진출의 성과를 남겼다.
 
이 결과는 2019년 같은 대회에서 대표팀의 결승 진출에 이어 두 대회 연속 4강 진출이기도 했다. 특히, 골짜기 세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눈에 띄는 선수들이 없고 대표팀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가치가 큰 결과였다.
 
이 대회는 애초 인도네시아가 개최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회 개막을 얼마 안 남겨둔 상황에서 선수단에 대한 안전 문제가 대두되면서 FIFA가 인도네시아의 개최권을 박탈하고 아르헨티나가 급하게 대회를 대신 개최하는 돌발 변수가 있었다.

이로 인해 대표팀은 뜻하지 않게 긴 이동을 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에 대회에 나서는 대표팀은 FIFA 주관하는 대회임에도 언론이나 미디어의 관심이 크지 않았다. 개최지가 너무 멀다는 거리상 문제도 있었지만, 낮은 기대감으로 각 방송사에서 현지 중계팀을 파견되지 않았고 취재 열기도 뜨겁지 않았다. 대표팀은 무관심이라는 또 다른 적과도 싸워야 했다.
 
하지만 대표팀은 실력으로 그들의 존재감을 알렸고 두 대회 연속 4강 진출이라는 결과와 함께 큰 환영을 받으며 귀국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이번 대회에서 활약했던 선수들도 축구팬들과 언론에서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U-20 남자 월드컵 대표팀은 그들을 알리는 쇼케이스를 멋지게 치렀다 할 수 있다.

 

 

 


 
젊은 축구 선수들의 성과는 그 세월을 거슬러 1983년에서도 있었다. 당시에는 19세 이하 세계 청소년 남자 축구 선수권대회라 불렸던 FIFA 주관의 이 대회에서 지극히 낮은 인지도에도 한국 대표팀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4강 진출을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이 4강 진출은 2002 한. 일 남자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4강에 진출하기 전까지 4강 신화로 불릴 정도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당시 대표팀은 예선 통과조차 불투명했고 무명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회 장소인 멕시코는 대표팀 선수들에게는 생소한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경기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대표팀은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예선 통과국 북한이 국제경기 심판 폭행 사건으로 인해 국제 대회 출전 정지 징계를 받으며 본선 진출의 기회를 극적으로 얻었던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그것도 행운이 함께 한 축구의 변방이었던 아시아의 무명 선수들도 구성된 대표팀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일 리 없었다.
 
하지만 대표팀은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훈련을 소화하며 강한 체력과 기동력의 팀으로 변모했다. 고지대 경기를 대비한 혹독한 체력 훈련은 경기 내내 대표팀이 엄청난 활동량으로 경기를 주도하는 바탕이 됐다.
 
대표팀은 16개 팀이 본선에 진출한 이 대회에서 개최국 멕시코가 속한 예선 A조에 속했고 첫 경기 스코틀랜드전에서 패했지만, 이후 멕시코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연달아 승리하며 8강에 진출했다. 연승의 기세를 탄 대표팀은 8강전에서 우루과이에게도 승리하며 4강에 진출했다. 이는 국. 내외 언론에 큰 관심으로 이어졌다. 외신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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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들은 뛰어난 조직력에 지치지 않는 기동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대표팀의 경기를 보고 대표팀에게 대표팀의 붉은 유니폼에서 파생된 ‘붉은 악령’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붉은 악마’라는 말로 번역되어 대중들에게 전해졌다. 훗날 ‘붉은 악마’는 국가대표 축구팀을 응원하는 서포터즈인 ‘붉은 악마’ 응원단으로 재 탄생했다. 
 
4강에 진출한 대표팀은 선제골을 넣는 등 세계 최강 브라질과 접전을 펼쳤지만, 아쉬운 패배로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3. 4위전마저 패하며 4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대표팀은 세계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회가 열린 멕시코 현지인들도 대표팀의 경기에 매료되어 대표팀을 응원하기도 할 정도였다. 대표팀은 그 대회가 끝나고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했고 엄청난 환영 인파들이 기다리는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대표팀에 대한 환영 인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우리 축구는 아시아의 강자라고 했지만, 아시아권에서도 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한국 축구가 세계대회에서  4강에 올랐다는 건 큰 쾌거였다.
 
그 시절에는 문화, 예술인, 스포츠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국민적 영웅이 됐다.  국민적 관심이 큰 구기 종목인 축구 대표팀의 성적에 대한 반응도 당연 뜨거웠다.  당연히 대표팀의 귀국길은 엄청난 환영 인파로 채워졌다. 대표팀 선수단은 공항에서 시내까지 도로를 메운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카퍼레이드를 했다.

 

 

 



이 장면은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지금의 기준이라면 다소 낯 뜨거운 장면이지만, 그때는 스포츠에서 국제 대회 입상은 국위선양의 중요한 수단이었고 정권 차원에서도 이를 강하게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환대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이후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은 국가대표 감독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축구의 대표적 지도자가 됐고 대표팀 선수들 상당수가 이후 성인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며 한국 축구의 한 시대를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1983년 19세 이하 세계 청소년 남자축구 선수권대회 4강 이후 이후 한국 축구는 국제 대회에서 그 이상의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986년부터 축구의 가장 상위 레벨의 국가대항전인 월드컵에 연달아 출전했지만, 조 예전에서 거듭 고배를 마시며 세계 축구와의 격차를 확인할 뿐이었다. 이는 연령별 대표팀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그 사이 1983년의 결과는 영광의 순간을 넘어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신화가 되고 말았다.
 
그 신화는 긴 세월이 지나 2002년 한. 일 월드컵 4강 신화로 재현됐다. 그 대회에서 대표팀은 세계 축구의 강호들을 연파하며 4강에 올랐고 이는 한국 축구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 대회의 주역들은 한국 축구의 중추로 자리하며 축구 발전을 이끌었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후 월드컵에서 4강은 재현되지 않았지만, 한국 축구는 꾸준히 그 수준을 높였고 수차례 16강 진출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제는 FIFA 랭킹도 상위권이고 다수의 한국 선수들이 축구의 가장 무대인 유럽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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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2년 한. 일 월드컵을 전후로 우리 축구에서 새롭게 부각된 이름이 있다. 앞서 1983년 19세 이하 세계 청소년 남자 축구 선수권 대회를 설명하며 등장했던 명칭, ‘붉은 악마’의 출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악마’는 유럽이나 남미의 축구 강국들, 심지어 일본에서도 울트라 재팬이라 불리며 활동하던 세계 축구 문화의 한 부분이었던 프로클럽팀 및 축구 국가대표 팀에 대한 응원단이라 할 수 있는 서포터즈 문화를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그 속에서  축구 국가대표팀을 위한 응원단을 만들어 보자는 축구팬들의 뜻이 모여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이 만들어졌다. ‘붉은 악마’는 1983년 대회 4강 신화를 이룬 청소년 대표팀처럼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강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들의 별칭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축구팬들의 선한 의지가 모여 만들어진 국가대표 서포터즈 ‘붉은 악마’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그 존재감을 본격적으로 나타냈고 홈에서 열린 2002년 한. 일 월드컵에서 그 활약이 절정을 이뤘다.
 
경기장은 물론이고 전 세계 축구사에서도 없었던 도심 광장에서의 거리 응원을 주도하면서 붉은 악마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단체가 됐다. 2002년 한. 일 월드컵에서는 대표팀의 극적인 선전과 함께 모든 국민이 ‘붉은 악마’였습니다. ‘붉은 악마’의 조건은 그저 붉은색 티셔츠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에 국가대표 유니폼은 물론이고 붉은색 티도 없어서 못 파는 정도였다.

또한, ‘붉은 악마’는 경기장에서 대표팀을 응원하는 인상적인 카드 섹션을 선보이기도 했고 그 속에서 ‘꿈은 이루어지다’는 말이 크게 깊은 인상을 남기도 했다. 또한, ‘붉은 악마’가 주도하는 응원 과정에서 등장하는 노래와 구호도 대중들이 함께 했다.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응원가는 응원가를 넘어온 국민이 사랑하는 최고 인기 가요로 주목받기도 했다. 거의 한 달여 기간 온 국민이 즐긴 2002년 한. 일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는 선수들과 함께한 또 다른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축구팬들 국민들 마음속에 ‘붉은 악마’는 우리 축구를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또한, '붉은 악마'는 선수들를 비난하지 않고 응원에 집중하고, 경기 후 주변의 쓰레기를 치우고 정리하는 등의 성숙된 응원 문화를 이끌고 정착을 이끌기도 했다. 
 
이후 ‘붉은 악마’는 법인화를 이루며 팬들이 참여하는 한 단체로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상업성 추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애초 설립 취지가 퇴색되는 부작용 등으로 내부 갈등이 생겼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 운영진 해체와 함께 순수 동호인 모임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붉은 악마’는 조직을 이끌 집행부가 사라진 이후에도 국가대표 축구 대표팀의 경기를 응원하는 팬들을 대표하는 단어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붉은 악마’는 최초의 축구 4강 신화와 함께 우리 축구사에 남아 있고 지금도 축구팬들과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붉은 악마’는 누군가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닌 축구팬들의 순수한 마음이 모인 자생적 모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인 건전한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비록, 그 역사가 이어지지 못했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조직이었다.

이렇게 1983년 세계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선전과 그로부터 파생된 '붉은악마'까지 이 두 가지는 스포츠사적으로 기억해야 할 일이고 존재였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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