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방영이 잘 안되고 있는 정통 역사 드라마지만, 과거 재미있게 봤던 역사 드라마 중 정도전은 통해 고려말, 조선 초의 역사적 흐름과 각종 사건, 그 안에서 펼쳐진 인물들의 지략 대결을 볼 수 있었다. 이전 왕이 중심인 드라마와 달리 정도전은 조선개국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지만,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정에서 피의 숙청을 당한 정도전을 전면에 내세웠다.정도전은 고려만 조선 초기 역사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이방원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이후 역사의 뒤편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가 기틀을 세운 조선이 수백 년을 이어갔지만, 그는 언급조차 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대신 고려를 지키기 위해 그와 대립했던 정몽주가 추앙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
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 그에 대해 현대의 평가는 개혁군주였다는 점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정치, 사회적으로 조선의 부흥을 이끌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해 다양한 정치 세력의 공존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같은 양반이면서도 관직 등용에서 철저히 배격됐던 서얼, 후처 소생의 자녀들에게 기회를 부여했다.또한 정조는 소수 기득권층만을 위한 정치가 아닌 일반 백성들을 삶에도 관심을 가지는 민생정치를 추구했다. 정조는 노예제도 개선에도 힘썼고 지방의 토착 비리 근절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함에 있어 부역에 나서는 이들에게 일정 보수를 지급했고 농업 외에 상공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실학자들도 권력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
고려 역사에 있어 몽고와의 전쟁은 사상 유례없는 장기간의 투쟁이었다. 당시 아시아는 전체는 물론이고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치던 몽고군은 세계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이 침공한 나라는 예외 없이 굴복당했다. 하지만 고려는 30여 년을 버티며 그들과 맞섰다. 하지만 긴 전쟁으로 인해 일반 백성둘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 몽고군의 약탈과 노략질에 전 국토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파괴되고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고려는 장기간의 전쟁을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겼다. 몽고군이 육지에서 세계 최강이지만, 해전에 약하는 점을 이용한 결정이었다. 강화도에 자리한 고려 정부는 대몽 전쟁을 이끌었다. 문제는 강화도 고려 정부가 민생을 외면한 그들만의 삶을 영위했다는 점이..
얼마 전 TV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우리에게 아직 멀기만 제국 발해에 대해 다뤘다. 멸망하 고구려를 계승하고 그들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에 대한 이겨기는 마음을 뜨겁게 했지만, 이후 우리 민족에서 만주 지역이 남은 땅이 되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만주 지역은 과거 요동, 요서라 불리던 곳으로 우리 민족 삶의 터전이었다. 특히, 삼국시대 고구려는 이 지역을 근거지로 중국의 대제국과 당당히 맞서며 우리 민족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했고 주변 이민족들을 지배하는 제국의 면모를 갖췄다. 이런 고구려가 중국 통일 왕조에는 눈엣 가시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고구려는 중국의 신흥 제국 당나라와 신라의..
충북 충주시에 중앙탑 공원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서 있는 중앙탑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볼거리가 있는 곳입니다. 공원 중앙에 우뚝 솓은 석탑이 있습니다. 중앙탑이라 불리우는 이 탑의 정확한 명칭은 중원 탑평리 7층석탑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를 그 건축연대로 추정하고 있고 국보 6호로 지정될 만큼 큰 가치를 지닌 석탑입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는 의미로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근처에 고구려가 세운 중원 고구려비도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지역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탑을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곳을 사진으로 담기도 하고 산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중앙탑 근처에는 충주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국 내외 작가들의 조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