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아픔과 해방의 감격, 이후 일어난 6.25 한국 전쟁의 어려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4.19 혁명, 그 민주주의를 좌초시킨 5.16 군사정변까지 해방 후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가득했다. 그 사건들을 뒤로하고 대한민국은 1970년대부터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뤄냈다. 군사독재의 그늘 속에서 인권이 경시되고 민주주의의 가치가 크게 훼손되는 문제가 있었지만, 국민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잘 살아보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그 결실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산업화로 이어졌다.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의 아픔과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거치며 군사독재의 그림자를 걷어냈다. 과거의 완전한 단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 어떤 신흥국과는 비교가 안되는 민주화..
우리 현대사에서 1968년은 특히, 남북 관계에 있어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 해 1월 북한은 124군 소속 특수부대원 31명을 남파시켜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1.21사태로 불리는 그 사건에서 북한 특수부대는 청와대 수백미터까지 접근했던 소탕됐다. 31명의 부대원 중 28명이 군경에 의해 사살되고 1명은 실종, 또 한 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단 한 명의 부대원 김신조만이 생포됐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러 왔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면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외에도 1968년 1월 23일 원산 바다에서 첩보 활동을 하던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를 납북해 수십 명의 선원들을 억류했다. 그해 10월과 11월에는 동해진 울진, 삼척지역에 100명이 넘는 북한은 울진 삼척지구에..
조선의 역사에서 연산군과 정조는 지금도 크게 주목받는 임금이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드라마틱 한 삶을 살았고 재임 당시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사극 드라마에서 연산군과 정조는 그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대한 많은 관심에는 온도차가 있다. 연산군의 최악의 폭군으로 정조는 시대의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물은 연산군과 정조에 공통점은 없어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불행한 유년 시기를 보냈다. 왕의 자손으로 남부러울 것 없어 보였던 이들이지만, 정치적 상황과 사회 관습에 따라 연산군과 정조는 그의 모친과 부친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에 의해 중전 자리에서 폐서인 된 후 사약을 받았고 정조의 아버..
4월 11일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4월 13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연구를 통해 4월 11일로 정정되었고 임시정부의 역사는 2019년 100주년을 이미 맞이했고 또 역사를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는 최초의 민주공화국의 시작이라는 점과 나라의 주인, 주권이 국민들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조선의 주인은 임금이었다. 대한제국이 수립되긴 했지만, 권력은 황제에게 있었다. 그 전에 있었던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시도 등이 무산되고 오히려 전제군주제가 강화되는 역사의 퇴보였다. 이후 봉..
조선 말기 우리 역사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사건 중 하나가 동학농민혁명이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민란 정도로 평가절하됐던 동학농민혁명이었지만, 최근 그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녹두꽃은 이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일부 픽션이 가미되긴 했지만, 당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이 드라마는 최근 과거사 문제와 연관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와 한층 불편해진 한일관계속에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동학혁명은 드라마에서처럼 미완의 혁명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은 오래된 차별과 부정부패, 사회구조적 모순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
10월 26일은 현대사에서 격변을 가져왔던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유신헌법을 통해 사실상 종신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던 절대 권력자 박정희가 그의 최 측근의 총탄에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분명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이후 맞이한 절대 권력의 붕괴는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후 대한민국의 또 다른 군사 독재의 시대에 맞이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비극이 역사로 남았다. 그리고 그때의 아픔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사살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에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잃었고 이후 친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