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선수 소집 전날까지 선수 교체를 단행하며 신중에 신중을 더했던 항저우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의 여정이 마침내 시작된다. 10월 1일 조 예선 1차전 홍콩전을 시작으로 대표팀은 3차례 경기를 치르고 조 예선 결과를 안고 올라가는 슈퍼 라운드를 거쳐 2위 안에 들어가면 결승전에 오른다. 대표팀이 결승전에 오른다면 금메달까지 총 6경기를 7일 동안 치러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24명으로 제한된 선수 엔트리를 잘 활용해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대표팀은 몇 차례 부상 선수 교체 등을 거쳐 11명의 투수와 7명의 내야수, 4명의 외야수, 2명의 포수로 멤버를 구성했다. 최초 엔트리 발표 시 12명의 투수에서 엔트리가 한 명 줄었고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외야진 숫자를 늘리며 나름 균형을 맞춘 모습이다. 초..
팀 당 20경기를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지만, 프로야구는 1위 LG를 제외하면 상위권 순위가 아직 안갯속이고 포스트시즌 진출 팀 경쟁 역시 진행형이다. 여기에 비로 순연된 경기로 인해 다수의 더블헤더와 빡빡한 경기 일정도 함께 하고 있다. 여러 외적 요인으로 대중들의 관심이 잠시 줄어들고 있지만, 시즌은 절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상항에서 LG는 29년 만의 우승이라는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선 느낌이다. 9월 26일 현재 LG는 2위와 6.5경기 차로 안정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때 팀이 부진에 빠지며 2위와의 격차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정규리그 우승 매직넘버를 계산할 수 있는 상황이다. LG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불펜진의 핵심인 고우석과 정우영, 주전 3루수 문보경이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나서는 야구 대표팀이 소집 전날까지 엔트를 교체를 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아시안게임을 위한 여정을 본격 시작했다. 24명의 엔트리를 확정한 대표팀은 국내에서 합동 훈련과 연습 경기로 컨디션을 조절하고 10월 조 예선 첫 경기를 시작한다. 예선 B조에서 대표팀은 대만, 홍콩, 예선 라운드를 통과한 한 팀과 대결하고 예선을 통과하면 슈퍼 라운드 그리고 결승전과 3, 4위전으로 이어지는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결승전까지 진출한다는 전제를 하면 대표팀의 경기는 총 6경기다. 경기는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이어지고 휴식일은 하루뿐이다. 경기 수는 많지 않지만,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야구 종목에 참가한 나라들의 수준차가 큰 만큼, 메달의 색깔은 대만, 일본과의 대결 결과로 달라질 ..
프로야구가 치열한 순위 경쟁을 하는 시점에 서울시의 중요한 발표가 있었다. 그동안 프로야구의 중요한 숙원이었던 잠실야구장의 돔 구장으로의 신축 계획이 구체화됐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발표를 보면 기존의 잠실 야구장 부지에 약 5,000억 원이 소요되는 3만명의 관중 수용 규모의 돔 구장을 건설한다고 했다. 이 돔구장은 호텔과 각종 상업시설이 함께 들어서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복합 시설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잠실 야구장의 신축 문제는 오랜 전부터 프로야구의 중요한 현안이었다. 잠실 야구장은 1980년대 초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위해 다수의 경기장에 건립된 현재 잠실 스포츠 콤플렉스 일대에 건설됐다. 잠실 야구장은 한국 야구 역사에서 최초로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를 유치해 치렀던 경기장이고, 198..
잔여 경기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프로야구 상위권 순위가 다시 혼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미 리빌딩을 택한 키움과 상위권에 크게 멀어진 삼성과 한화, 롯데는 올 시즌을 접어야 할 상황이지만, 5할 이상의 승률을 유지하고 있는 상위 5개 팀은 포스트시즌 진출은 물론이고 그 안에서 조금 더 높은 순위를 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현재의 순위가 정규 시즌 마지막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9월이다. 이런 혼전의 중요한 요인은 NC와 KIA의 급상승, SSG의 추락이다. NC와 KIA는 9월 들어 많은 승수를 쌓고 있다. 두 팀 모두 완벽한 전력이라 할 수 없고 전력에 약점도 존재하지만, 상승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NC는 등판하면 승리를 보장하는 극강의 선발 투수 페디가 마운..
프로야구 역사를 빛낸 수많은 레전드 선수들 중 최동원은 매우 극적인 선수 생활을 한 선수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아마야구 시절부터 최고 투수로 국내외 대회에서 소속팀과 대표팀을 이끌었던 최동원은 그 과정에서 엄청난 혹사에 시달렸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투구 일정을 소화해야 했지만, 최동원은 묵묵히 던지고 또 던졌다. 그가 1983년 프로에 입단한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는 프로야구 초창기로 선발, 중간, 마무리의 투수 역할 분담의 개념이 없었다. 준비 없이 시작한 프로야구인 탓에 장기 레이스를 버틸 수 있는 선수층이 아니었고 구단이나 경기 운영도 아마야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의 기준이라면 도저히 프로라 할 수 없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있었다. 이에 팀에서 잘 던지는 투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