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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9일, 헌정사상 두 번째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그동안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그에 부수되는 각종 비리와 부패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것이 확인된 박근혜 대통령의 3차례에 걸친 대국민 담화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담화는 국민들의 분노를 더 들끓게 했고 100만이 넘는 인파로 광장을 가득하게 했다. 



100만 촛불은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했다. 그 안에는 남녀노소, 성별이 따로 없었다. 미성년자인 고등학생들까지 촛불을 들었다. 그들을 향해 불순세력, 좌익세력 등등의 음해와 모략이 있었지만, 지지율 5% 정권의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광장에 나서지 않아도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고 대통령에 등을 돌렸다. 



계속 악화되는 여론에 대통령은 정치권을 향해 개헌이라는 미끼를 던지는 한편 질서있는 퇴진론을 꺼내 들며 회유했다. 순간 정치권에는 흔들림이 감지됐다. 그들은 대통령의 즉시 퇴진을 요구하는 국민들을 요구를 망각했다. 검은 거래의 가능성도 마저 높아졌다. 하지만 촛불 민심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정치권을 강하게 압박해다. 사상 최대의 인파가 광장에 모였다. 그 힘에 정치권을 굴복했다. 그들은 국민의 요구를 더는 거역할 수 없었다.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탄핵은 다시 그 열기가 뜨거워졌다. 이에 미온적이던 여당까지 하나 둘 탄핵에 가세했다. 소위 친박이라 불리는 그의 세력들은 탄핵을 막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들 내부에서 마저 이탈자가 발생하며 탄핵의 흐름에 함께 휩쓸리고 말았다. 그렇게 대통령의 탄핵은 의결 정족수를 훨씬 넘게 가결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됐고 헌재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과 동시에 강력한 특검의 수사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이는 사실상 그의 정치인생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와 함께 권력의 중심에 자리했던 이들도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불투명해졌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과거 첫 번째 탄핵 사례인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가 큰 차이가 있다. 당시의 탄핵은 정치 지형의 변동과 함께 소수 여당이었던 열린 우리당에 맞선 거대 야당들의 일종의 횡포에 가까운 탄핵이었다. 탄핵의 사유역시 범죄사실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당시 야당의 탄핵은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국민들은 이에 반대하는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섰다.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국회의 탄핵은 엄청난 역풍을 불러왔다. 탄핵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 세력은 크게 몰락했다. 반대로 소유 여당 열린 우리당은 과반 여당으로 변신했다. 이런 국민적 여론은 탄핵심판을 하는 헌재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쳐다. 헌재는 탄핵안을 기각하며 탄핵사태의 종지부를 찍었다. 직무 정지됐던 대통령도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와 달리 지금의 대통령이 맞닥뜨린 상황은 정반대다. 국민 절대 다수가 그의 퇴진을 원하고 있고 각종 범죄에 대통령이 연루되어 있다. 현 정권의 시한폭탄과 같은 세월호 7시간의 의혹도 남아있고 그 밖에 해소되지 않은 의혹이 줄줄이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헌재의 심판과정을 통해 반전을 이룬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촛불로 대표되는 국민의 힘이 부패한 정권과의 대결에서 사실상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국민의 승리가 자랑스러우면서도 우려되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다. 과거 1987년 6월 항쟁을 아는 이들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결코 낙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명 체육관 간선제 대통령 선거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무시하고 힘으로 이를 억압하며 정권 연장을 시도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호헌을 발표하며 간선제 선거를 통한 대통령 선거를 선언했다. 



이는 큰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 시위에 일반 시민들이 가담했고 그 열기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정권은 강제 진압으로 민주화 시위를 막아내려 했지만,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진압 경찰외 최루탄에 맞아 사망에 이른 사건이 더해지며 정권에 국민의 분노를 극에 달했다. 결국, 힘으로 민주화 열기를 막아낼 수 없음을 인지한 정권은 당시 여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여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게 됐다. 민주화 투쟁의 승리였다. 



이렇게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대한민국이 열릴 것으로 보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담아내지 못한 야권을 분열했고 여당은 이를 파고들었다.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여권은 다수 후보가 나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야당 후보를 지지했던 과반수 이상의 국민들로서는 허탈한 순간이었다. 민주 정권으로 정권 교체를 열망했던 국민들의 6월 항쟁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국민들의 총선에서 여소 야대의 지형을 만들어주며 또 한 번 아댱에 기회를 주었지만, 3당 합당으로 통해 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이 등장하며 민주화의 흐름에 크게 역행하는 반동의 역사가 지배하는 정치지형이 형성되고 말았다. 6월 항쟁이 가져온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민자당은 그 이름만 바꿔 달았고 새누리당으로 이어지면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보수정당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은 사회 곳곳에서 권위주의를 걷어내는 등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권위주의와 기득권층의 부정부패, 구시대적 색깔론과 지역주의 등 나라를 병들게 하는 구태가 여전한 정치권을 형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불거진 최순실 사태는 우리 사회의 구시대적 적패가 여전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를 막지 못하는,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권을 대신해 국민들은 다시 일어섰고 국민 하나하나의 힘이 모여 대통령 탄핵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분명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에게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올바른 나라를 세울 임무를 맏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미 정치권을 이후 권력에 더 눈독을 드리는 모습을 보었다. 이 과정에서 개헌론과 이에 따른 정계개편 등 이합집산 움직임도 있다. 이는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국민적 열망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국민들은 여전히 정치권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다. 1987년 6월 국민들의 희생으로 이뤄낸 민주화의 새싹을 정치권은 꽃피우지 못한 전력이 있다. 



만약 또 다시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정치권이 살리지 못한다면 촛불은 정치권 정체를 향할 수 있다. 이는 아직 촛불을 거둬들일 수 없는 이유다. 2016년 12월 9일 대통령 탄핵은 어쩌면 끝이 아닌 기나긴 싸움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1987년 6월 항쟁때와 같은 허망한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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