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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사는 무신정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고 건국한 고려는 거란에 멸망한 발해 유인들을 포용하며 진정한 통일을 이뤄냈다. 이에 고려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로 인정받는다. 그전 통일 신라가 있었지만,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중심이 된 발해가 건국되고 남북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완전한 통일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고려는 내부적으로 왕권을 위협하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신흥 강국 거란과의 대결을 극복하며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안팎의 어려움을 이겨낸 고려는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했고 활발한 대외 교역을 하는 역동적인 국가로 자리했다. 지금 대외적으로 우리나라를 표현하는 코리아의 어원은 고려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번영의 시기를 지나 고려는 긴 평화시기를 맞이했다. 그 시기 고려는 건국 초기 북방민족에 단호히 맞서던 진취성이 사라지고 역동성이 사라졌다. 거란을 밀어내고 만주 일대의 패권을 장악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대한 고려는 맞서기 보다 적당한 화친을 택했다. 윤관이 북방을 개척해 세운 동북 9성을 여진에 내줬다. 고려의 외적 팽창은 더는 없었다. 내부에서도 계층 간 이동이 사라지고 문벌 귀족 중심의 닫힌 사회가 됐다. 문벌 귀족은 기득권 세력이 됐고 문인과 무인의 그 사이에도 차별이 발생하고 커졌다.

그 차별은 공고해지고 무인들은 문인들에 밀려 사실상 2등 관료가 됐다. 지속적인 차별은 무인들의 불만을 함께 키웠다. 그 사이 문벌 귀족 사회의 폐쇄성은 구조적 모순을  크게 했다.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저항이 커졌다. 하지만 문벌 귀족이 중심이 된 집권층은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의 지위를 지키고 향유하는데 주력했다. 외부의 위기는 사라졌지만, 내부의 위기가 커져갔다. 

 

 

 



이 위기는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이고 급격한 변화로 이어졌다. 지속적인 차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무인들이 궐기했고 그들은 차별에 대한 분풀이를 문인들에 대한 살육으로 대신했다. 수많은 문신들이 무인들에 살해당했고 왕 역시 그 대상이 됐다. 고려 사회의 집권층은 무인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무인들은 국가 경영의 경험이 없었고 국정 철학이나 비전이 없었다. 막상 권력을 장악했지만, 수많은 살육으로 관료조직이 붕괴했다.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이는 내재된 불만을 폭발시켰다. 무인 내부에서는 극심한 권력 투쟁이 발생했고 곳곳에서 민란과 반란이 일어났다.

무인 정권은 이를 수습할 역량이 없었다. 그들의 권력 암투에만 집중했다. 무인 정권은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으로 리더가 변화했다. 그 누구도 혼란한 사회를 수습하고 국정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무인 정권은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의 자식들이 그 권력을 이어가는 세습체제로 변질됐다. 

최 씨 무인정권은 겉보기에 권력투쟁의 혼란을 극복하긴 했지만, 사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한 건 아니었다. 최 씨 정권의 권력 기반이 공고해지면서 권력 투쟁의 가능성을 차단했을 뿐이었다. 최 씨 무인정권 역시 정통성 없는 독재 권력일 뿐이었다.

이런 최 씨 정권에게 큰 대외적 변수가 발생했다.  몽골 초원에서 부족 형태로 존재하던 몽골족들이 통일 왕조를 이루고 크 세력을 확장했다. 그들은 여진족의 금나라와 중국의 송나라를 차례로 무너뜨리며 그 세력을 확장했고 유럽까지 유라시아 일대는 장악한 대 제국으로 성장했다. 이런 몽골제국은 드디어 고려와 국경을 맞대게 됐다. 최 씨 정권에게는 몽골과의 관계 정립이 필요했다. 최 씨 정권은 강대강의 대결을 택했다.

이는 무모한 결정이었다. 고려는 대제국에 맞설만한 힘도 역량도 없었다. 내부적으로 소수 귀족과 무인 세력의 기득권만 강화되었을 뿐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극심한 착취 구조의 밑단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국가의 위기에 국가적 역량을 모으기 힘든 환경이었다. 최 씨 정권은 이럼에도 그들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는 걸 걱정했다. 몽골제국이 고려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무인 정권이 지속되기 어려웠다.

그 사이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냉각되고 팽팽한 긴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몽골은 고려에 굴복을 강요했지만, 고려는 그러지 않았다. 전쟁을 필연이었다. 마침내 1231년 몽골제국은 고려 침공을 단행했다. 여몽전쟁이 시작됐다. 그 전쟁은 무려 1259년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 사이 몽골제국은 원나라가 나라 이름을 바꾸었고 무려 9차례나 고려를 침공했다. 몽골제국의 침략에 거의 모든 나라들이 빠르게 항복했지만, 고려는 그렇지 않았고 강하게 저항했다. 몽골제국의 정복사에서 고려만큼 긴 세월 저항한 국가는 없었다.

이런 고려의 저항은 정권의 힘이 아니었다. 힘없고 약해 보이는 백성들의 힘이었다. 그들은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층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를 초토화하는 침략자들에게 단호히 맞섰다. 이런 백성들이 있어 고려는 수십 년의 항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1231년 1차 침략은 몽골 자신 저고여의 피살 사건이 이유가 됐다. 저고여는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국경 인근에서 피살됐다. 몽골제국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보고 그 보복으로 전격 침략을 단행했다. 저고여 암살을 두고 그의 오만방자한 행태에 분개한 고려의 암살이라는 설과 몽골제국의 자작극, 금나라 잔존 세력의 암살 등의 여러 설이 존재한다. 전쟁의 도화선이긴 했지만, 고려와 몽골은 언제든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몽골의 1차 침공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몽골군은 고려 귀주성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고전했다. 귀주성은 박서 장군을 중심으로 민.관.군이 힘을 합쳐 몽골군에 대응했다. 몽골군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저항이었다. 귀주성 전투를 4개월간 이어졌다. 몽골군의 부담이 커졌다. 그 사이 고려군은 소수의 결사대가 몽골군을 공격하기도 했고 정부에 저항했던 농민 반란군까지 몽골군과의 전투에 참여해 힘을 더했다.

하지만 이런 귀주성의 저항에 최 씨 정권의 중앙군은 전혀 힘이 되지 못했다. 고려 중앙군은 최 씨 정권의 안위를 지키는데 중점을 둔 부대였다. 실제 몽골과의 수십 년 전쟁에서 고려 중앙군의 역할을 미미했다. 고려 조정은 오히려 몽골과의 화친을 위해 귀주성의 항복을 종용했고 귀주성은 몽골군에 항복했다. 심지어 전쟁의 주역인 박서 장군은 삭탈관직되어 귀향하는 신세가 됐다. 

이렇게 고려는 몽골에 항복을 했다. 몽골군은 철수했다. 고려는 항복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최 씨 정권은 장기간의 항전을 위해 수도를 강화로 옮기는 천도를 단행했다. 몽골군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점을 이용했다. 문제는 이런 강화천도가 정권의 안전을 도모하는 측면이 강했다는 점이었다.

항전을 위해 강화도를 강력한 요새로 만들어야 하는 게 상식이지만, 최씨 정권은 궁궐과 강화도에 거주할 관료들과 귀족들의 궁궐과 거주지 건설을 우선시했다. 실제 강화도에서 집권 세력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에게 몽골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파괴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은 남 예기였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권이었다.

집권층이 몽골군에 대응한다는 방편이라 내세운 건 몽골군의 침략으로 소실된 불교 경전의 제작이었고 세계 문화유산이 팔만대장경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강력한 불심으로 외적에 맞섰다는 취지와 달리 팔만대장경 제작에는 막대한 비용과 인력, 예산이 필요했다. 고려의 문화, 예술 역량이 집약된 결과물이긴 했지만, 전시에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한가한 불사였다. 

이런 정권의 무능과 무책임함에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백성들, 국민들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백성들은 곳곳에서 저항했다. 각 지역별도 승전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윤후라는 뛰어난 장수가 나타났다. 그는 몽골의 2차 침공 당시 지금의 용인인 처인성 전투에서 적장 살리타를 전사시키고 승리를 이끈 승려 부대를 이끌었다.

작은 토성이었던 처인성은 고려 시대 행정구역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행정단위인 향, 소, 부곡중 하나였다. 향. 소. 부곡은 특정 물품을 생산하는 특수 행정조직으로 그 지역민들 역시 신분적인 차별을 받았다. 그 지역민들이 김윤후를 중심을 뭉쳐 몽골군에 승리했고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퇴각했다. 그 공으로 처인성 지역은 처인현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몽골군의 침략은 이후 계속됐다. 3차 침공 시에는 영남지역까지 공격당하면서 일대가 황폐하되고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됐다. 그때마다 고려는 항복을 하는 척 상황을 모면했다. 하지만 고려는 항복 조건 이행의 필수적인 왕의 입조와 개경 환궁을 이행하지 않았다. 몽골군은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침략을 지속했다.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 백성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몽골의 5차 침공 시에는 충주성에서 극적인 승전 소식이 들려왔다. 그 승전을 이끈 이는 2차 몽골 침략 시 처인성 전투 승전의 장수 김윤후였다. 그는 승려신분이었지만, 이후 벼슬을 받고 환속하여 장군이 됐다. 충주성 전투에서 김윤후는 크게 불리해지는 전황을 극복하지 위해 큰 결정을 했다. 그는 노비 문서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우고 전공을 세운 이들에게 벼슬을 약하는 파격적인 약속을 하며 충주성의 민심을 다독이고 항전 의지를 드높였다. 70여 일간의 전투 후 몽골군은 충주성 점령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이런 저항에도 수십 년간 지속된 전쟁은 백성들의 삶을 피페하게 만들었다. 끝나지 않는 전쟁에 모두가 지쳐갔다. 고려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은거한 채  정권의 안위에만 주력했고 민생을 수습할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민심은 정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단단하게 최 씨 정권의 기반도 흔들렸다. 1258년 최 씨 정권의 계승자 최의가 피살되면서  최 씨 정권이 무너졌고 고려 조정에는 몽골과의 강화론이 대세가 됐다. 고려 조정은 몽골의 강화조건을 받아들였고 1259년 여몽전쟁이 종결됐다. 고려의 패전이었다.

이후 몽골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몽골로부터 지속적인 내정간섭을 받았고 국토 일부를 상실하기도 했다. 친 몽골 세력인 권문세족들은 지속적으로 국정을 농단하고 국가의 부를 장악했다. 침략자에 맞섰던 백성들의 삶은 전쟁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목숨을 건 항전의 결과는 비참했다. 

하지만 침략자에 대한 저항정신은 이후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황을 바꾼 의병들의 항전과 일제의 침탈에 저항한 의병 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근, 현대사에서도 국민들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하나 된 힘을 보여주는 장면을 자주 보였다.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에 근거한 위기를 국민들의 결집된 힘으로 극복하며 대한민국은 발전했다. 고려 시대 세계 최강국 몽골제국에 맞섰던 백성들의 정신은 긴 세월이 흘러도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위기 극복이 취미라는 농담 섞인 말이 나올 수 있는 이유다. 

한편으로서는 국가적 위기에도 그들의 기득권 유지에 더 주력하는 집권층의 행태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씁쓸함으로 남는다. 정권을 잡았다면 나라를 올바른 방향을 이끌고 위기를 방지해야 하는 게 중요한 일이지만, 역대 정권들 중 상당수는 그 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고려 몽골과의 수십 년 전쟁 당시에도 정권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에 여몽전쟁의 역사는 결고 먼 옛날의 역사가 아니고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역사일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보다 정치와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권력자들이 나쁜 판단을 하지 않도록 여론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나라의 주인이고 그 주인들이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더는 국민들이 위기 극복의 숨은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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