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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에 속한 섬 강화도는 우리 역사의 모든 부분을 함께 한 곳이었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선사시대 유적은 한반도의 역사가 시작된 곳임을 증명하고 있고 고대 국가가 생겨내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경쟁하던 시기에는 삼국의 주도권 경쟁의 중심지였던 한강과 더불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후 통일 국가인 고려 시대에는 오랜 세월 이어진 대몽항쟁의 중심지였고 고려 왕궁이 강화도에 터 잡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강화도는 수많은 왕족들의 유배지이기도 했지만, 수도 한양과 연결되는 해상 수송로의 길목에 자리한 수상 교통의 요지로 큰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장으로 서구 열강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장소였다. 이후에는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하면서 조선 개항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강화도는 우리 역사 시대를 모두 아우르는 한민족의 역사가 압축된 곳이었다. 이런 역사적 전통은 강화도에 각 시대별 유적과 유물들을 남겼고 역사 교육장으로서 그 가치를 높였다. 또한, 최근에는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가 놓이고 교통망이 확충되면서 수도권 지역의 중요한 여행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멋진 바다 경관과 역사적 유물들 농촌과 어촌이 혼재하는 독특한 문화, 남북 분단의 최 전선에 자리한 안보 관광지로서의 또 다른 가치가 더해지면서 강화도는 다양한 콘텐츠를 갖춘 여행지가 됐다. 

그리고 또 하나 강화도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중심으로서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얼핏 현재의 강화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강화도는 굴뚝에서 연기가 내 뿜어지는 공업지대가 쉽게 연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화도에는 산업화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TBS의 역사기행 프로그램 흔적에서는 강화도를 찾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강화도의 역사 흔적을 함께 했다.

 

 

조양방직

 



강화도는 일제 강점기부터 방직 공장들이 곳곳에 들어섰고 관련 산업이 발달했다. 강화도는 앞서 언급한 대로 조선시대 수상 교통의 중심지로 물류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런 물류상의 이점은 공장이 들어서기 유리한 환경이었다. 일제 강점기 섬유 산업은 그 수요가 크게 증가하던 매우 유망한 산업이었다.

여기에 강화도는 왕골을 이용해 만드는 돗자리라 할 수 있는 화문석의 주 산지로 섬유산업과의 연관성이 있었다. 강화도의 대표적 생산품인 화문석을 짜는 건 강화도에서 매우 보편적이었고 이는 옷감을 만드는 방직산업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물류와 숙련된 인력까지 섬유 산업 발전에 강화도는 유리한 환경이었다. 

이렇게 강화도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방직 공장들이 하나 둘 들어섰고 그 공장들을 중심으로 번화가가 조성됐다 지금 강화도 원 도심이 바로 그곳이다. 이후 강화도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이후에도 방직산업의 중심지로 자리했다. 수많은 방직 공장이 들어섰다. 몇몇 기업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하며 지역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강화도를 대표하는 기업의 소유주는 지역의 유력 인사로 자리했고 훗날 국회의원이나 군수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강화도의 방직산업은 지역을 대표했고 강화도의 풍요를 상징했다. 

이런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강화도 나고 자란 나이 어린 여성들이었다. 제품 생산에 있어 섬세한 손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는 여전히 남존여비의 분위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에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에도 많은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하며 이전 조선 사회와는 다른 풍경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한편에는 뿌리 깊은 남녀 차별의 전통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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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개화된 가정을 제외하고 여성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적극적인 가정이 많지 않았다. 조선 말,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가 아닌 농. 어촌 지역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경제적 여건도 작용했다. 또한, 교육의 기회는 남성 자녀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집안일들 도우며 신부수업을 하다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가는 게 보편적인 삶이었다. 그에 반하여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성은 신여성으로 불리며 사회적 관심을 받았지만, 그 수는 소수였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매우 티는 인물이었고 부정적 시선을 받아야 했다. 

강화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강화도 방직산업의 발전은 교육 기회가 사라진 어린 소녀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였다. 방직 공장 취직은 스스로 돈을 벌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었고 학교 대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또한, 공장에서 일하는 건 외부 세계와의 소통으로서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이에 강화도 지역의 10대 소녀들은  방직공장에 취업하기를 고대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이 소녀들의 노동은 강화도 각 가정에 큰 보탬이 됐다. 

하지만 강화도 방직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편견 가득한 사회 시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의 삶이 왜곡되어 알려지는 부당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들의 노동이 가계 경제에 큰 도움이 되고 있음에도 많은 여공들은 가족에게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의 벌어온 돈으로 가계 생계를 유지하거나 남성 자녀들의 교육비를 충당하는 현실에서도 여자가 정숙하지 못하게 밖으로 나돌고 남자들과 어울린다는 등의 말들 들으며 설움을 마음 가득 가지고 살아야 했다.

 

방송 링크

 

https://youtu.be/m3u_MXD7ZTE

 



프로그램에서 과거 강화도의 방직 공장에서 일했던 할머니는 그때의 설움으로 감정이 복받치는 모습을 보였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장을 다녔지만, 월급을 받아 집에 쌀이나마 사가지고 가는 날이 아니면 매일매일 부모님의 가시 돋친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할머니는 심지어 공장 출근을 위한 준비도 스스로 해야 했고 아침 식사조차 자신의 직업 지어 먹어야 했다. 그러면서 공장일을 하는 딸을 안쓰러워하며 따뜻한 아침밥을 차려주던 다른 집 이야기를 할 때는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는 프로그램  곳곳에서 인터뷰를 했던 많은 할머니들이 겪었던 일이었다. 당시 10대 어른 소녀들은 편견 가득한 시선과 설움에도 미래가 없는 집을 나와 매일매일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는 게 즐거웠고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게 즐거웠다. 힘든 공장 노동에도 소녀들은 매월 지급되는 월급봉투에 힘들었던 기억이 눈 녹듯이 사라지곤 했다. 그 돈으로 집에 보탬도 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녀들은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방직이나 직물 공장은 대표적인 노동집약형 산업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기업가들로서는 가능하면 값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었다. 10대 소녀들은 그에 부합하는 노동력이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소녀들은 힘든 공장 노동에 기꺼이 임했다. 

공장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산업 특성상 많은 먼지와 공해 물질이 배출되는 공장 환경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그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각종 호흡기 질환에 시달려야 했고 건강 악화로 공장을 떠나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엄청난 노동시간과 저임금 속에 일해야 했다. 이는 산업화 단계를 겪었던 다른 선진국처럼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힘들게 했다. 노동자들은 보통 하루 12시간을 일했고 연장 근무를 하게 되면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여기에 나이 어린 여성들이 대부분인 공장의 노동자들은 여성으로서 지속적인 차별 속에서 일해야 했다. 공장의 관리자 대부분은 남성들이었고 여성 노동자들의 일은 매우 한정적이고 승진 등의 기회를 얻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은 기계의 한 부속품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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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노동자들의 상황은 이해하고 도와줄 이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동법이 존재했고 노동자들을 위한 정부기관과 공무원이 있었지만, 그들은 노동자 편이 아니었다. 산업화 시기 한국의 노동자들은 철저한 을의 위치였고 그들의 노동 여건 개선이나 처우 개선들의 요구를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부당한 대우와 조치를 당하고도 노동자들이 이를 호소할 곳도 없었다. 

이런 강화도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상황을 주목한 곳이 강화도의 성당이었다. 외국인 주교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상황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강화도는 개화기 이후 가톨릭 성장이 빠르게 들어섰고 많은 신자들이 있었다. 강화도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성당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방직공장 노동자들 중 상당수도 성당을 찾는 든 신앙생활을 했다. 그 속에서 노동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지고 공부를 하면서 자신들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노조 설립 등 노동자들의 권익을 요구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과 연결됐다. 강화의 가톨릭 성당과 뜻있는 교회 등이 이에 동참했고 평소 노동환경 개선에 관심이 컸던 김수환 추기경이 힘을 더했다. 강화도 지역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종교계의 후원 속에 힘을 얻었다. 우리나라의 노동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인 1960년 대 후반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사측은 노동운동 주도자들을 부당 해고하거나 종교 활동을 금지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방해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회유했다. 심지어 노동운동에 나서는 이들을 좌익, 용공세력으로 매도하는 일도 있었다. 방직공장 소유자들은 지역의 유력 인사가 되고  힘 있는 정치인이 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사측의 방해는 관계 기관의 묵인 속에 지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와 삶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점점 힘을 얻었고 우리나라 노동 운동의 중요한 흐름을 이끌었다. 노동운동은 1970년대 들어 전태일의 분신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사회 각계각층의 호응을 얻었다.

 

 

심도직물 굴뚝 흔적

 



이는 1960년 대 이후 1980년대까지 이어진 독재 정권에 대해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과 연결됐다. 그 점에서 강화도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강화도 지역에서의 노동운동은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오랜 세월 사회적 약자로 차별적 구조 속에 살아야 했던 여성들이 그들에 대한 부당함을 개선하려는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으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강화도는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영광과 함께 여러 문제들을 투영하고 있는 곳이었고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 실현을 위한 노력이 함께 하는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역사스테이 흔적에서는 강화도에서 잘 알려진 선사시대, 고려 시대, 조선시대 유적지를 탐방하는 대신 일제 강점기 그리고 광복 후 산업화 시대 속 강화도의 또 다른 면을 살폈다.

지금은 과거의 방직공장들이 관련 산업의 쇠퇴와 함께 다 떠나가고 그 자리에 레트로 느낌 가득한 카페 등이 들어서며 관광 명소가 됐지만, 역사스테이 흔적은 그 안에 담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역사를 알려주고 그 장소들이 가지는 의미를 함께 보여줬다. 이를 통해 역사가 위인들이나 영웅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했다. 


사진 : 프로그램 /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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