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요사에서 가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한 명인 조용필의 컴백 뉴스가 얼마 전 나왔다. 그는 2018년 데뷔 50주년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그 공연에서 70살을 앞둔 나이에도 2시간이 넘는 공연을 게스트 없이 그의 노래로만 채우는 강력한 에너지와 함을 보여줬다. 그의 무대는 크고 웅장하고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화려했다. 그의 히트곡과 더불어 무대 예술의 극치를 선보였다. 그렇게 전국 순회 콘서트를 연 이후 그의 20집 앨범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2013년 조용필은 세상을 놀라게 한 타이틀곡 "Bounce" 와 함께 19집 앨범을 발매했다. 18집 앨범 이후 거의 10년 만의 새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서 조용필은 그의 음악의 완성을 넘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조용필은 ..
전라북도 김제시는 모든 경계가 전라북도 시군과 접하면서도 바다와 함께 접하는 도시다. 이런 김제시를 특징하는 건 넓은 평야다.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를 품고 김제시는 예로부터 넓고 기름진 농토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기원전 고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됐고 지금도 김제시의 넓은 평야에서는 벼농사가 주를 이루며 막대한 생산력을 유지하고 있다. 김제시는 대표적인 농업 도시로 경지면적은 전국 3위, 경지율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드넓은 평야를 품고 있는 김제시는 농업이 근간이 되는 시절 풍요의 고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량을 수탈하는 일제에 의해 고난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이 넓은 평야가 김제시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매년 10월이면 김제시 지평선 축제가 열리고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
이방원의 마지막 고민이었던 후계 구도가 정리됐다. 이방원은 계속된 비행과 왕의로서의 자질 부족 등을 문제를 들어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결정했다. 그는 대신들과의 논의 과정을 거쳤지만, 폐세자의 명분을 얻기 위한 과정에 불가했다. 이방원의 마음속에서 세자는 이미 지워졌고 그 자리는 충녕대군이 대신했다. 충녕대군 역시 왕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결국, 양녕대군은 세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마지막까지 세자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이미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난 아버지 이방원을 뜻을 알고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남은 건 그의 거취 문제였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왕족의 운명을 대부분 죽음으로 귀결됐다. 양녕대군의 존재는 이방원을 물론이고 충녕대군에게도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미 이방원은 왕..
1776년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한 13개 주가 모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며 시작된 미국의 역사는 끊임없는 개척의 역사이기도 했다. 대서양 연안에서 미국은 점점 서쪽으로 그 영토를 확장했고 마침내 태평 연안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은 북극권의 알래스카와 태평양의 섬 하와이까지 그들 영토에 포함하면서 미국 국기 속 별 개수와 같은 50개 주로 이루지는 광대한 영토의 미합중국을 이뤄냈고 세계 최강국이 됐다. 이런 영토 확장의 역사에서 많이 나오는 말이 개척정신, 프런티어 정신이다. 새로운 땅을 찾아 그 땅을 개척하는 건 건국 이후 미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사명이었다. 과거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 개척지인 미국 동부 해안에 터전을 잡은 이후 미국은 신대륙에서 그 영역을 넓히고 고도의 민주주의 체..
전라북도 임실군은 전북의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어 사면이 전라북도의 다른 시군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임실군은 산지가 많고 섬진강의 상류를 품고 있다. 멋진 산세와 자연 풍경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전원의 풍경은 임실군을 대표하는 모습이다. 임실군과 정읍시 경계에 건설된 섬진강댐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 호수 옥정호는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또한, 임실치즈는 지역의 대표 브랜드로 큰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67회에서는 봄 색깔이 짙어지는 임실군을 찾아 지역의 명소와 이웃들의 삶을 함께 살피며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 아침 임실의 명소 옥정호를 찾았다. 운무가 낀 호수의 모습은 신비로우면서도 장엄한 느낌이었다. 옥정호는 사시사철 ..
이방원에게 수성을 위한 길에서 중요한 문제가 등장했다.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있는 중전 민씨 집안에 대한 처리와 후계자 결정에 관한 일이었다. 이방원은 치열한 권력 투쟁과 잔혹한 숙청 등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차기 권력에 대한 걱정을 마음 가득 안고 있었다. 자칫 자신의 구축한 왕 중심으로 중앙집권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다면 그가 권력을 잡기 위해 흘린 피와 각종 과오에 대한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도 연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에 그는 매사에 위험 세력의 발생 가능성을 살피고 차기 권력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 했다. 여전히 두 명의 장성한 처남이 있는 민씨 가문은 이방원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장인 민제는 병으로 사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