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영상으로 우리 동네를 탐방하는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가 찾은 3번째 동네는 서울 은평구 그중에서 북한산 바로 아래 자리한 불광, 녹번동이었다. 불광, 녹번동은 삭막한 서울에서 자연의 숨결을 가득 느낄 수 있는 북한산이 병풍처럼 동네를 감싸고 있고 한옥이나 역사 유적지는 없지만, 점점 사라져가는 추억 속의 장면들이 함께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오래전 지어진 단독 주택들과 다세대 주택들이 유독 많은 이 동네의 골목길을 걷다가 만난 동네 탐방의 첫 장소는 부자가 운영하는 대장간이었다. 이 대장간은 80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대장간을 이어받아 운영하는 아들이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마트에 가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쇠로 만든 생활용품들이지만, 이 대장간에서는 사람의 힘으로 제품을 하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수다 한 마당, 알쓸신잡이 12월 첫 주말 찾은 장소는 서해의 섬 강화도다. 강화도는 자동차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다리가 있고 언제든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이제는 섬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수도권 사람들에게는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고려, 조선, 근대사의 흔적이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보고다. 알쓸신잡에서는 전국적으로 첫눈이 내리던 날 강화도의 이곳저곳을 찾고 강화도의 연대기를 말로 풀어갔다. 강화도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화도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이 그것을 증명한다. 강화도 역사 박물관에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고인돌은 거대한 돌을 채석장에서 작업을 통해 ..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사실상 주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배 체제로접어들었다. 일본은 통감부를 통해 사실상 대한제국을 통치했다. 서구 열강들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일본의 강압에 대한제국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대한제국에게 1907년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는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의 뜻에 반하는 불법 조약임을 세계에 알리고 지원을 얻어내랴 했다. 이것이 헤이그 특사사건의 시작이었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8회에서는 이 헤이그특사 사건을 다뤘다. 헤이그 특사사건은 3명의 특사를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파견하기 까지 첩보전과 같은 과정을 ..
인기 연예인들의 신변잡기, 인기 맛집과 해외여행지, 누구나 셰프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쿡방 등 화려한 화면과 빠른 전개로 가득한 예능 프로그램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느리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는 프로그램이 찾아왔다. 중견 배우 김영철이 1인칭 시점으로 우리 주변의 삶을 걸어서 탐방하는 다큐 형식의 여행기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가 그 프로그램이다. 1회에서는 마포구 성산동과 망원동을 돌아보았고 2회에서는 지금은 창원에 속한 마산의 합포구를 찾았다. 이곳은 과거 우리나라가 한참 산업화에 올인하던 시기, 수출자유지역으로서 수출항으로 큰 역할을 하던 마산항, 그 마산항을 중심으로 대형 방직 공장이 들어서고 섬유 산업이 발전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섬유 산업이 쇠락하고 과거의 영화를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자동차 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 자동차 메이커 벤츠, BMW, 폭스바겐은 높은 가격에도 그만큼의 품질을 보장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판매되었다. 과거에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지만, 최근에는 수요층도 크게 확대되었고 우리 일상에서 독일 자동차는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BMW의 특정 차종에서 화재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수년간 BMW 차량의 화재건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올해는 관련 뉴스가 잊을만하면 등장했다. 최고 품질이라고 자부하던 독일차의 화재 사고는 소비자들의 독일차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과는 크게 상반되는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BMW의 자세였다. 무엇보다 동일한 사건이 발생한 미국과 비교되는 대응에 해당 차종을 소유하고..
1905년 11월 17일, 그날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국의 직위가 사실상 사라진 날이었다. 그날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에 빗대어 1905년 을사년의 이름에서 따온 을사년스럽다라고 표현했고 지금의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이 탄생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1905년 이전 이런 표현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1905년 을사늑약의 우리 역사에서 치욕적인 날이었다. 그 늑약에 서명한 이완용을 비롯한 5명의 대신들을 을사 5적으로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7회에서는 을사늑약과 관련한 국내외적 상황을 다뤘다. 당시 일본은 조약에 대해 논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