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마지막 왕조였던 조선시대의 역사는 1592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가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다. 그만큼 임진왜란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임진왜란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다. 전 국토는 황폐화됐다. 산업의 근간인 농업을 지탱하는 농토의 피해는 극심했다. 그때의 피해는 조선 후기에 복구되지 못했다. 또한, 전란의 와중에 조선의 사회 시스템 전반이 파괴되고 전후 수습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여기에 16세기와 17세기 소빙기라 불릴 정도로 이상 저온 현상으로 대표되는 이상 기후는 농업생산을 더 위축시키고 식량난을 불러왔다. 전쟁과 이상기후는 일반 백성들의 삶을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기아와 질..
코로나 사태 전 터키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여행지 중 하나였다. 멋진 자연과 동. 서양이 교차하는 독특한 문화 전통, 6.25 한국 전쟁 참전 등의 이유로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현지의 우호적 분위기도 터키에 대한 친밀감을 높였다. 그중 이스탄불은 대표적 관광지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이 나뉘고 아프리카와도 연결되는 지리적 위치는 이스탄불을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 만들었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스탄불을 소개하는 각종 프로그램이나 영상을 보면 이슬람의 문명과 서양의 문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이스탄불은 로마제국 시대 그 이름을 바뀌기 전까지 비잔티움이라 불렸고 이후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콘스탄티노폴리스나 콘스탄티누폴리스 등으로 불렸다..
최근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5주간에 걸쳐 유럽의 아메리카, 아시아 지역 진출로 대표되는 대항해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발견의 시대라고도 하는 이 시기는 15세기 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 각국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새로운 땅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교역을 활성화하던 시기를 말한다. 하지만 그 이전 중국 명나라 영락제 때 정화라는 인물이 인도를 거쳐 아랍, 아프리카 연안에 이르는 대항해를 한 일이 있고 해상무역을 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인 사고라는 부정적 주장도 존재한다. 이런 이견을 떠나서 대항해 시대는 기존 유럽과 신대륙이 본격적으로 직접 교역을 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유럽이 ..
4회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참혹하고 비극적인 전투였던 독소 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26회에서는 전쟁의 결말과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몰락의 역사에 대해 살폈다. 나치 독일은 1945년 5월 연합군에 두 번의 항복을 했다. 5월 8일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서방에 5월 9일은 소련에 다시 한번 항복을 해야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눠져 대립하는 양극 체제의 서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소련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독일의 독재가 히틀러가 공산주의 소련의 독재가 스탈린의 입지를 단단히 해주는 결과가 됐다. 그만큼 독소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전장이었던 독일과 소련이 대결한 동부전선, 그 전선에서 양국이 대결했던 독소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교양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25회에서는 독소전쟁의 양상을 크게 달라지게 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살폈다. 1942년 8월 21일 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약 6개월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양측을 합쳐 다수의 민간인이 포함된 200여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다. 그만큼 스탈린그라드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또한, 상징적인 의미가 큰 도시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와 공산주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이 도시에 대해 큰 애착을 보였고 가용한 전력을 모두 쏟아부었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그 이름이 볼고그라드로 불리는 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장이었던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의 대결했던 독소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 324회에서는 독소전쟁의 배경과 초반 전투 상황에 이어 전개 과정을 다시 살폈다. 그 과정에서 나치 독일의 잔혹함과 엄청난 희생이 있었던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관련한 비극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기조의 상호 불가침 협정을 어기고 소련 서부지역 전반에 기습공격을 감행한 나치 독일은 개전 초반 큰 우세를 보였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가 부족했고 그들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대규모 전차부대를 앞세운 독일의 고속 기동적, 전격전에 소련의 서부 방어선을 붕괴됐고 나치 독일은 소련의 영토 깊숙이 빠르게 진격했다.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된 나치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