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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19회] 삼국지 다시 보기, 간웅과 영웅 사이의 인물 조조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7. 1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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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사건들을 재조명했던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여름 특집으로 중국의 중요한 고전인 삼국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는 황하강 유역의 중국 영토가 확장되고 현대 중국 영토의 원형을 이루게 했던 시기로 중국사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삼국지는 삼국시대를 조명한 역사서 삼국지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틀어 말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삼국지는 삼국시대 이후 들어선 나라 서진 시대 진서라는 역사가 진수가 집필했다.

삼국지연의는 이후 1,000년의 시간이 흐른 14세기에 살았던 소설가 나관중의 이야기로 작가적인 상상이 크게 반영되고 있다. 삼국지연의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소설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상충되는 부분도 상당 부분 존재한다. 다만, 그 어느 시대보다 치열하게 대립하고 치열하게 싸웠던 삼국시대의 시대적 배경과 그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모습은 극적인 재미를 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이 등장하는 촉나라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이 많지만, 실제 삼국시대를 주도한 나라는 위나라였다. 

그 당시 위나라는 삼국 중 가장 강한 국력의 나라였다. 위나라는 고구려 동천왕 시대 관구검이라는 장수가 고구려를 침략해 도읍지를 점령하는 등 큰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 우리 역사에서도 등장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훗날 삼국의 통일 역시 위나라를 계승한 서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조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위나라의 기초를 세운 실권자로 삼국 경쟁을 주도했던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조에 대한 후대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 긍정의 평가 역시 시대의 간웅이라는 표현으로 그를 묘사한다. 간웅은 일반적인 영웅과 달리 시대의 처신에 능하고 간사하면서 꾀가 많은 인물이다. 이런 평가와 함께 조조는 시대의 잔혹한 권력자라는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고 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조조라는 인물에 대해 입체적으로 살폈다. 

조조의 등장은 후한 말기 중국의 극심한 혼란과 함께 한다. 후한 말기 권력은 십상시라 불리는 환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의 측근에서 황제를 보위하던 환관들은 밀접한 관계를 이용해 황제의 눈과 귀를 막고 전권을 행사했다. 그들에 반대한 세력들은 무자비하게 숙청했고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그때 등장한 십상시라는 용어는 최근 일어난 우리의 촛불 혁명의 단초가 된 국정 농단 사건 당시 대통령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한 세력들을 지칭하는 말로 언론에서 자주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은 날로 도탄에 빠졌고 관리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이는 전국적인 민란을 불러왔다. 대표적인 반란은 황건적의 난이었다. 황건적의 난은 그 세력을 매우 커서 나라 전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중앙 정부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각 지역별로 황건적의 난에 대응하기 위한 의용군이 일어났다. 이는 지역의 군벌들이 그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그 과정에서 삼국지의 중요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런 군벌들의 힘을 빌려 황건적의 난을 그 기세가 꺾였지만,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환관들의 횡포도 여전했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조정 내에서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군벌인 원소와 동탁이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원소는 십상시들을 대거 제거하며 왕실의 혼란을 불러왔다. 그 사이 동탁은 황제의 신병을 확보함과 동시에 최고 권력자로 거듭났다. 동탁은 이에 더해 기존의 황제를 폐하고 나이 어린 황제,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를 옹립하며 권력을 손에 넣었다. 

동탁은 성정이 포악하고 악행을 일삼았다. 기존 십상시들의 주도하던 국정의 난맥상은 그 주체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런 동탁의 독재에 맞서 전국에서 군벌들이 세력을 규합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그 중심에는 최고 군벌인 원소가 있었고 조조는 그 세력과 힘을 합쳤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을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 조조는 황제를 손아귀에 넣고 권력을 전통성을 확보한 동탁의 강력한 권력에 대응하기 망설이던 반 동탁 진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며 인지도를 높였다. 당시 최고 권력자에 맞서는 일종의 투사로서 조조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조는 그 아버지가 환관의 양자로 태생적인 약점이 있었다. 후한 말기 환관 세력이 강했던 탓에 조조의 집안은 비교적 윤택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컸지만, 출신의 배경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에는 큰 콤플렉스였다. 조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강력한 법치의 실현과 뛰어난 정치 감각과 용인술, 문장가로서의 능력을 더해 점라 그 이름을 알렸다. 특히, 그가 하급 관리 시절 조조는 혼란한 나라 상황 속에서 무너진 치안을 다시 강화하고 권력자의 친척을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하는 등 과감한 조치로 민심을 얻었다. 당시 황건적의 난과 극심한 수탈 구조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에게 조조는 기존 권력자들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에 더해 조조는 반대 세력들도 적극 포용하는 대범함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조조는 황건적의 잔당들을 포섭해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면서 그 세력을 더 키워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 폭정을 일삼는 동탁과 맞서는 영웅의 면모까지 보이면서 민심까지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조조는 전쟁 과정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하고 반대파에서 대한 자비 없는 숙청을 하는 등 냉혹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후한 황실에 대한 지속적인 핍박과 악행은 훗날 유교 사상이 뿌리내린 이후 그에 대한 평가를 부정적으로 하는데 큰 원인이 됐다. 소설 삼국지에서도 조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조조지만, 그가 중국 삼국시대 경쟁의 중심에 있던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중국의 정치, 경제의 중심은 황화강 유역의 화북지역이었다. 조조는 그 화북지역을 자신의 세력 안에 넣었다. 쓰찬 지방을 기반으로 했던 유비의 촉나라와 양쯔강 유역을 기반으로 했던 손권의 오나라는 행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시스템이 완성된 곳이 아니었다. 나라의 통제권을 그들의 영역 전체에 발휘하기 어려웠다. 촉나라와 오나라의 세력을 합쳐도 위나라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화북지역의 패권을 놓고 조조는 원소와 대결했다. 삼국지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관도대전이었다. 개전 초기 조조는 우월한 세력을 가진 원조에 밀리는 흐름이었다. 10배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고 삼국지에서는 묘사되고 있지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분명한 건 조조가 열세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는 성에 은거해 수성전을 전개했고 전투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장기전 역시 조조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조조군의 군량이 바닥을 보였다. 이 위기에서 원소의 측근 인사가 귀순해 왔다. 그는 조조에서 원소의 군량 창고가 있는 오소 지역의 공격을 주장했다. 배신과 음모, 치열한 첩보전이 이루어지는 시기 상대측 인사의 계책을 따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조는 과감히 그 주장을 받아들였고 공격을 성공적이었다. 이후 조조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결국, 관도대전은 조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 패배의 충격 탓인지 원소는 급사했고 그 세력은 내분을 일으켰다. 조조는 그 틈에 원소가 장악한 지역을 차지했고 그 세력까지 자신의 영역에 넣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조조는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관도대전의 승리는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에 의해 세워진 위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일이었다. 조조는 반대 세력들을 모두 제거하면서 그의 입지를 더 단단히 했다. 이제 조조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형주 지역의 유비와 화남지역의 손권 정도였다. 하지만 유비는 조조와의 대결에서 연전연패하며 그 세력이 미약했고 손권 역시 홀로 조조와 맞서기는 무리였다. 이는 유비와 손권의 연합을 불러왔고 이들과 조조가 대결하는 적벽대전으로 이어졌다. 중국 전력을 장악하려는 조조의 야심으로 시작된 적벽 대전에서 조조는 크게 패했고 이는 위촉오의 삼국이 맞서는 삼국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이렇게 조조가 중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그는 태생적 한계를 자신의 실력으로 극복한 입지적적 인물이었다. 조조는 흐트러진 법치는 다시 세우고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여러 인재들을 두루 기용하고 차별을 두지 않고 능력에 따라 보상을 했다. 이에 각지의 인재들이 조조에 모여들었다. 그가 악평대로 잔혹하고 교활하기만 했던 인물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조조는 혼란한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실제 과거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재조명되고 있기도 하다. 이는 역사의 기록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가질 필요성을 높인다. 그 점에서 조조는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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