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회생,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고사 성어가 딱 맞는 경기였다. 최강야구 몬스터즈가 시즌 2의 26번째 경기 중앙대와의 1차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으로 시즌 19승 달성에 성공했다. 승률은 0.732로 시즌 3를 위한 조건인 시즌 7할 승률 확정까지 3경기만을 남겨두게 됐다. 패했다면 몬스터는 남은 5경기에서 4승 1패 이상이 필요했지만, 3승 2패만 하면 7할 승률이 가능한 몬스터즈다. 한결 목표 달성이 수월해졌고 그만큼 승리의 의미가 컸다. 승리하긴 했지만, 몬스터즈는 중앙대의 끈끈한 팀 컬러에 고전하면서 힘든 경기를 했다. 올스타전 이후 3주 이상의 경기 공백이 있어 선수들의 경기 감각이 다소 떨어졌고 프로 구단에 입단 예정인 정현수, 고영우, 황영묵, 김민주에 소속팀 일정으로 함께 하지 못한 유태..
고려 초기 역사는 대외적으로 거란과의 치열한 대결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간 중요한 장면이 있었다. 1009년 일어난 강조의 정변은 고려 역사상 최초로 왕이 신하에게 폐위되고 시해당하는 사건이었다. 후사가 없었던 목종의 죽음은 고려 태조 왕건의 직계 자손들의 왕위 계승이 단절된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건은 발단은 목종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에 있었다. 대중들에게 고려 목종이 무능력하고 어머니 천추태후와 그의 내연남 김치양에 휘둘려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왕으로 알려져 있고 고려사를 배경으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목종은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그의 동성애적 성향이 더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목종의 치세 기간 고려는 거란, 송나라와 실리 외교를 펼치며 전쟁을 방지했고 북방의 군사력을 ..
최강야구가 모처럼 그들의 경기를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몬스터즈는 나이대로 YB와 OB로 팀을 나눠 청백전 형식의 색다른 올스타전을 개최했다. 이 경기를 통해 몬스터즈는 그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40대 이상의 올드보이 투수들과 비 주전 선수들이 실전 경기에 나설 수 있었고 프로구단의 지명을 받은 젊은 선수들 역시 몬스터즈에서 마지막 경기를 기분 좋게 할 수 있었다. 김성근 감독은 경기 승패에 대한 부담과 고뇌를 내려놓고 먼발치에서 선수들의 플레이를 관찰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에 경기 전 다양한 식전 행사와 선구 가족들의 이벤트 등으로 흥겨운 분위기도 연출됐다. 이 과정에서 메이저리그를 경험했던 이대호와 김선우 해설 위원이 야수와 투수가 아닌 투수와 야수로 맞 대결하는 보기 드문 장면도 함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은 북극과 가까이 있어 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척박한 환경 속에 있지만, 세계 대표적인 복지 국가로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북유럽 국가 중 노르웨이는 오랜 세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1905년에서야 독립을 이루는 등 현대 국가로서 발전이 북유럽 국가들 중 가장 늦었다. 노르웨이는 오슬로가 수도이고 대서양과 북극해를 접하고 있는 나라로 한반도 면적의 약 2.7배의 영토지만, 인구는 548만 명에 불과해 인구 밀도가 매우 낮다. 과거에는 넓은 해안선을 따라 수산업이 산업의 주류를 이뤘고 북유럽에서는 경제 규모가 가장 작은 나라였다. 하지만 현재 노르웨이는 그들의 바다에서 다량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북..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시기는 삼국시대 그중 고구려의 역사다. 지금은 우리 영토가 아닌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여러 북방 민족과의 대결과 전쟁을 통해 나라의 영역을 넓혔고 만주 일대를 장악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이에 그치지 않고 수나라와 당나라까지 강력한 중국 통일 왕조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주성을 잃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강국의 입지를 단단히 했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자주적이 외교와 활발한 대외 교류를 했고 주변 북방 민족들을 아우르는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668년 나. 당 연합군에 멸망한 이후 만주 지역은 우리 ..
조선의 역사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가장 큰 시련기였다.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전면전이었고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두 차례 전란은 기존의 신분제 질서를 흔들었고 조선 사회의 큰 변화를 불러왔다. 아쉽게도 그 변화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조선을 보다 열린 사회로 이끌지 못했다. 기존 사대부 양반 중심의 기득권은 오히려 더 공고해졌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나마 조선 초기 계층 간 이동이 가능했던 사회 구조는 더 폐쇄적으로 변했다. 당시 국제 정세가 유럽의 대항해 시대 도래 이후 상호 교류가 활발해졌지만, 조선은 그런 시대적 흐름에 무심했고 중국과의 교류에만 의존하는 은둔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조선의 발전을 더 저해하는 요인이 됐다. 조선 후기 현실 개혁을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