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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월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당시 미국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11개 주와 북부지역을 기반으로 한 링컨 대통령 정부의 남북전쟁 중이었다. 1861년부터 시작한 전쟁은 북부 연합이 우세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남북 모두에 인적, 물적으로 큰 피해가 발생한 참혹한 대결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전쟁의 전세를 북부에 유리하게 바꾼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링컨으로서는 정치적으로 큰 승부수였고 결과적으로 미국이 견고한 연방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워싱턴이 미 건국의 아버지라면 링컨은 미합중국을 연 대통령으로서 미국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47회에서는 링컨과 남북전쟁, 전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던 노예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속에서 인간 링컨의 면모와 당시 시대상, 노예해방 선언의 의미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으로 다시 살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1860년 미국은 남부와 북부의 차이가 극명했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대도시가 발전하고 급격히 인구가 증가했다. 이에 비해 남부는 넓은 토지를 중심으로 농업이 산업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농업 생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목화 농장과 면화 생산이었다. 목화 수확과 면화 생산을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수적이었다. 

 

 


그 노동력의 대부분은 흑인 노예들로 채워졌다. 드넓은 농장에서 재배되는 목화를 기반으로 생산되는 면화는 미국의 대표적 수출품이었고 국. 내외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막대한 부를 안겨줬다. 그 부의 대부분 대토지를 소유한 남부 지주들의 몫이었다. 흑인 노예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충족시켜주면 일 년 내내 활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었다. 그들의 피, 땀, 눈물로 지주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흑인 노예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지주들에 의해 사고 팔리는 가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남성은 일을 잘 할 수 있는 체격조건과 힘, 여성은 많은 아이를 생산할 수 있을지 여부였다. 그들은 지주들의 소유물로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흑인 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가혹 행위, 비인격적 대우는 일상이었다. 이를 피해 도망을 선택한 노예들이 다시 잡히면 엄청난 고문과 폭력을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더 많은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노예 업자들이 노예제도가 없는 북부지역의 흑인들을 강제로 납치해 노예로 파는 등의 위법행위까지 자행됐다. 

그 시대 유럽은 인권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되는 등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민주 공화정이 시작되고 민주주의 제도가 가장 먼저 사회 시스템으로 자리한 미국에서는 오히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노예제도가 더 공고히 자리하는 아이러니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미국에서도 노예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북부 지역에서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상황이었고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여론이 점점 커지는 상황이었다. 노예제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일단 대중들에게 흑인 노예들의 참혹한 현실을 알렸다. 흑인의 시각에서 서술된 노예제도의 여러 문제들은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이 소설이 남북전쟁의 또 다른 원인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만큼 소설의 주는 힘은 매우 강했다.

노예제도는 정치적으로 큰 쟁점이 됐다. 북부지역을 기반으로 한 공화당은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 입장이 분명했고 남부지역을 기반으로 한 민주당은 노예제도의 존속을 각 주의 선택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남부지역에서는 노예제도의 폐지가 그들 경제력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남부지역의 경제를 지탱하는 기반이었기 때문이었다. 남부지역으로서는 노예제도 폐지로 경제력이 약화된다면 연방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할 수 있었다. 

반대로 북부는 이미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업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경제 규모나 인구 등에서 북부는 남부에 비해 우위에 있었고 이는 정치적인 영향력에서도 차이를 발생했다. 이에 남부와 북부의 대립은 커져만 갔다. 노예제도와 관련한 갈등은 그 대립을 더 키우는 요인이었다. 남북전쟁이 경제적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를 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런 팽팽한 남북의 대립 속에 노예제로 반대론자인 공화당의 링컨이 1861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남부지역의 위기감은 더 커졌고 급기야 11개의 남부주가 연방에서 탈퇴하는 일로 이어졌다. 하나의 미국이 둘로 쪼개지는 사건이었다. 링컨은 취임 후 노예제도의 폐지에 있어 남부 주들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발언을 하는 등 점진적인 변화를 천명했지만, 남부주들의 연방 이탈을 막을 수 없었다. 링컨은 연방 유지를 강력한 주장하면서 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이는 남부와 북부의 무력 충돌을 불러왔다. 

1861년 남부 연합은 남부 지역에 연방군이 주둔하고 있던 섬터요쇄를 공격하면서 군사 행동에 나섰다. 남북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 초기 링컨은 쉽게 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부연합군의 저항은 매우 강렬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남부연합의 의지는 객관적인 전력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했다. 개전 초기 북부 연방군은 크게 고전했다. 그렇다고 나부 연합이 북부 연방을 완전히 굴복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링컨기념관 - 픽사베이

 


전쟁은 링컨의 임기 내내 이어졌다. 이 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 경쟁적으로 개발된 신무기는 대규모 사상자를 발생하게 했다. 큰 전쟁을 치르지 못했던 미국의 전시 의료체계는 매우 부실했고 이는 다수의 사망자를 늘리는 원인이 됐다. 양측의 치열한 대결이 지속되면서 피해 규모를 나날이 커져만 갔다. 남부연합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했다. 이들의 지지를 얻는다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해도 독립국가로 자리할 수 있었다. 이는 연방의 영구적인 분열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링컨으로서는 상황을 바꿀 승부수가 필요했다. 이미 전쟁이 길어지면서 그의 대통령 재선에도 빨간불이 켜진 상황이었다. 링컨이 내놓은 카드는 노예해방 선언이었다. 링컨은 노예제도와 관련한 유화책을 거부했다. 이는 남북전쟁에서 북부 연방의 도덕전 우위를 확보하도록 했다. 전쟁의 이유가 연방의 유지라는 명분에 더해 노예제도 폐지라를 명분을 더했다. 이는 남부 연합이 비인권적인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부도덕한 세력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유렵과 남부연합의 연결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다. 물론, 이와 관련해 링컨의 정치적 목표를 위한 승부수로 그 의미를 축소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 선언 자체만으로 미국 역사에서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이와 동시에 북부는 물론이고 남부의 흑인들도 전재에 참전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었다. 다수의 흑인들이 북부 연방군에 참전해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링컨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이후 북부 연방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 연방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북부로 넘어왔다. 이후 전쟁은 북부 연방의 승리라는 대세가 변하지 않았다.

링컨은 1863년 11월 격전의 현장이었던 게티즈버그에서 유명한 연설을 하며 민주주의 중요한 원칙을 천명했다. 링컨은 2분여의 짧은 연설 속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주창했다. 이는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물론이고 국민의 권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 안에는 전쟁 후 미국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 국가 통합이라는 대 명제를 그는 연설에서 역설했다. 

하지만 링컨은 그가 원했던 하나 된 미국을 완성하지 못했다. 1865년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재선에 성공한 링컨은 얼마 안 가 남부연합을 지지하는 인물에 암살을 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이었던 인물의 허망한 최후였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미국 민주주의에 그대로 녹아들어있다. 

 

5달러 지폐 링컨 - 픽사베이

 


링컨은 매우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고 독학으로 공부해 변호사가 됐다. 그 과정에서 링컨은 프로 레슬러로 통산 300승을 기록하는 독특한 이력을 쌓기도 했다. 훗날 링컨은 미국 프로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정치인 링컨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선거에서 수없이 낙선을 했고 사업의 실패로 막대한 빚을 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고 유력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특히, 노예제도와 관련해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 더글라스와의 치열한 논쟁은 그를 전국구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이런 치열한 삶을 통해 링컨은 큰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의 정치인이 됐다. 미국이 갈라질 수 있는 상황에도 강력한 의지와 리더십으로 이를 극복했다. 하지만 링컨은 그 한편에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청년 시절 사랑하던 애인을 먼저 떠나보낸 아픈 기억이 있다. 또한, 그의 아들 중 몇 명이 젊은 시절 먼저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사람들은 링컨을 위대한 인물이라 하지만, 인간 링컨은 고뇌와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 최후마저 큰 불운과 함께 했다. 어쩌면 이런 링컨의 이력이 그를 그 큰 위인으로 기억하게 하는 지도 모른다. 

링컨에 의해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미국 시민으로 온전한 권리를 모두 보장받은 건 아니었다. 민주시민에게는 필수적인 참정권도 쉽게 행사할 수 없었고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피해자로 삶을 살았다. 미국에서 흑인들은 여전히 약자가 인종차별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링컨의 나라지만, 그가 모든 걸 바쳐 이뤄낸 노예해방은 아직 완성됐다 할 수 없다. 이는 미국이 하나로 뭉치는 데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남북전쟁, 링컨, 노예해방은 하나로 연결되는 키워드다. 미국의 역사를 논하면서 이 단어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링컨의 역사의 변화에서 리더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역사를 흐르게 하는 하는 건 이름 없는 국민들이지만, 그들의 움직이게 하는 추동력은 그 시대 리더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링컨은 미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 발전에서도 충분히 연구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사진 : 프로그램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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