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6.25 한국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263회 전쟁 개전 전 상황을 살펴본데 이어 개전 이후 서울 함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참전, 서울 함락과 낙동강 전선에서의 치열한 접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까지 과정을 전쟁 초기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치밀한 준비 끝에 우리의 방심을 틈타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우리 군은 대비가 부족했고 전선의 상황을 개전 초기부터 크게 불리했다. 특히, 소련제 신형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세에 우리 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우리 군에는 탱크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탱크의 위력 앞에 군의 방어선을 속절없이 무너졌다. 북한군은 38선 방어선을 넘어 서울..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3년 넘게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고 우리는 분단국가로 남게 됐다. 이후 남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맞서게 됐고 비극적인 전쟁은 종료되지 않았고 휴전의 형태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2회에 거쳐 전쟁의 전후 상황, 전개 과정을 소재로 삼아 프로그램을 꾸몄다. 263회에서는 1949년 3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국내외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쟁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들을 정리했다. 해방 이후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
1945년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미진했던 친일청산이었다. 친일청산의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자리하고 있다. 일제에 협력해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은 자자손손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 사회의 중요한 기득권 세력이 되었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자손들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현실이 대비되며 국민적 공분을 불러왔다. 이러한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번번이 벽이 부딪혔다. 세대가 바꾸면서 친일청산의 문제는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친일 청산을 위한 범정부적인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48년 조직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는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와 영합한 이들에 대해 법적 응징을 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62회에서는 이 반..
1948년 10월, 대한민국의 여수지역을 중심으로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제주 4.3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던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후 여수, 순천, 구례까지 정부군과 반란군의 치열한 교전이 일어났다. 이는 대규모 유혈사태를 불러왔다. 한때 여순 반란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군사 반란 사건이었고 이후 대한민국이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가 되는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61회에서는 이 여순사건의 배경과 진행 상황, 시사점을 다뤘다. 여순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주 4.3사건에 있었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과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된 상황에서 ..
4.19 혁명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60년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시민혁명은 이승만의 하야와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우리 현대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60회에서는 4.19 혁명 6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4.19 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4.19 혁명의 중요한 원인은 앞서 언급한 3.15 대통령, 부통령 부정 선거에 있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의 계속된 실정과 부정부패도 큰 원인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승만은 대통령 연임을 지속하며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이야기는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의 주요 소재였다. 조선실록을 비롯해 관련 기록이 다수 남아있어 역서적 고증이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수백 년간의 기록 속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 안에서 여러 이야기 소재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중에서 조선 숙종 임금과 인현왕후, 장희빈 등 얽혀있는 이야기는 그동안 수차례 드라마 소재로 활용되었고 당대 유명 여배우들이 장희빈 역시 캐스팅되어 연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골을 우려내듯 드라마화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졌다. 그만큼 그 이야기는 드라마틱 하고 극적인 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숙종의 중전이었던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밀려 서인으로 강등되어 유배생활을 했고 이후 복권되어 중전 자리로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