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밀양의 지명에는 은 한자로 햇볕이 빽빽함을 의미하는 의미가 있다.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던 시절 햇볕이 잘 들고 강과 가까운 밀양은 풍요로운 지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밀양 지역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나라를 형성했던 기록이 있다. 대구와 부산 시에 자리한 밀양은 KTX 철도가 정차하고 대구, 부산 고속도로가 지나는 등 영남권의 교통 요지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영남권 신공항 건설과 관련해 부산 가덕도와 치열한 유치 경쟁을 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영화배우 전도연이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밀양을 통해 많은 알려지기도 했다. 밀양은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높고 험준한 산맥이 도시를 감싸는 분지 지형이기도 하고 남쪽으로서는 낙동강이..
차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이방원의 움직임이 본격화 되는 시점에 큰 변수가 발생했다. 이방원의 움직임을 에의 주시하던 정도전이 먼저 움직였다.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이유로 이방원을 포함해 왕자들에 거느리고 있어 사병들을 중앙군 편제에 포함토록 했다. 정도전의 사병혁파 정책은 이성계의 승인 속에 빠르게 진행됐다. 명분은 요동정벌이었다. 당시 명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조선은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중요한 외교정책이었지만, 명나라는 조선에 강한 반감을 보였다. 이에 정도전은 아직 명나라의 세력이 완전히 미치지 않는 요동지역에 대한 정벌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명나라와 보다 대등한 외교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 내면에는 사병혁파에..
동시대 온 나라를 흔들었던 연쇄 살인범 중 한 명인 구영춘(유영철)이 잡혔다. 송하영과 범죄행동분석팀은 치열한 분석과 노력 끝에 그의 체포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구영춘과의 거듭된 면담 과정에서 연쇄 살인범들의 심리와 그들의 행태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송하영은 구영춘과 치열한 심리전을 전개하며 그에게 말로서 강한 일침을 날리며 기싸움에서 이겨내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또 다른 연쇄 살인범 남기태(정남규)가 서울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범죄를 이어가고 있었다. 송하영은 그 사건에 더 강하게 메달렸다. 경찰들 역시 그를 추격했다. 남기태는 경찰의 추적을 비웃듯 같은 패턴의 살인을 지속했다. 심야 시간 홀로 귀가하는 여성들을 주 대상으로 했다. 힘없고 저항하기 힘든 대상을 상대로 남기태는 ..
일본과 관련한 뉴스를 접할 때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 야스쿠니 신사다. 1869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 내전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장소로 그 역사가 시작됐고 1879년 일왕에 의해 지금의 이름이 하사되어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은 장소가 됐다. 하지만 실상은 그곳에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 이에 앞장섰던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고 일본 침략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과 대만인들까지 이곳에 합사되어 있다. 형식은 민간 종교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 극우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장기간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의 수상 정치인들이 주기적으로 이 신사에 방문해 참배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물론..
범죄 심리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 반환점을 돌아 후반부 7, 8회를 방영했다. 7회와 8회에는 2,000년대 초반 온 나라를 공포와 경악 속으로 빠뜨렸던 2명의 연쇄 살인범 유영철과 정남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두 살인마는 당시 마치 경쟁을 하듯 무고한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철저히 존재를 감추며 장기간 범행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연쇄 살인 사건이었다. 당시 경찰은 이들의 검거를 위해 온 역량을 집중했지만, 새로운 범죄에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에 경찰은 상당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나날이 지능화되고 진화하는 범죄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이 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범죄 행동 분석, 프로파일러의 영역이 확대되는 계기였다. 7, 8회에서는 구영철이라는 이름을 나온 유영철 ..
이방원이 유약함을 떨쳐내고 본격적인 권력 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 건국의 중요한 공신이었지만, 아버지 이성계의 뜻을 거스른 정몽주 격살을 주도한 이유로 이성계의 눈밖에 난 이방원은 아버지와 멀어진 거리에 좌절했다. 여기에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이방원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더 커졌다. 이런 원망의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이방원은 점점 권력에서 멀어졌고 그를 견제하는 신덕왕후에 그 입지가 점점 줄어들었다. 신덕왕후와 이성계는 나이 어린 세자에게 이방원이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에 대한 견제는 점점 더 강해졌고 이방원은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처가의 안전까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이방원은 숨죽이며 살아가던가 자신의 자리를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