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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매년 4월 15일을 매우 특별한 날이다. 그날은 전 선수와 코치진, 심판들까지 등번호 42번을 단 경기복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메이저리그 그리고 미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의 일환이다. 그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이다. 

재키 로빈슨은 1947년 4월 15일 흑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2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당시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을 시기였고 흑인들의 국민으로서의 권리 행사나 사회활동 전반에 제약이 있었다. 미국은 1863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인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1865년 헌법개정을 통해 노예제 폐지, 1868년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 부여, 1869년 모든 인종에게 투표권 부여 등의 조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미국의 여러 주는 여전히 인종분리 정책을 유지했고 일상생활 중 대중교통이나 화장실 이용 등에서 흑백 간 분리와 차별이 여전했다. 흑인의 참정권 역시 법망을 피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무력화했다. 흑인들의 참정권이 제대로 인정받은 건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주도한 흑인 인권운동이 결실을 맺은 1965년 민권법과 투표법이 시행된 이후였다. 이런 흑인들의 인권 신장이 가시적으로 일어나기 한참 전인 1947년 메이저리그 경기에 등장한 재키 로빈슨의 존재는 미국 사회에서 큰 충격이었다. 

그가 메이저리그 무대에 나서는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재키 로빈슨은 1919년 가난한 흑인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후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어머니와 가족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살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재키 로빈슨은 마음을 다잡고 학교생활을 했다. 그는 그의 형과 함께 여러 스포츠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형 맥 로빈슨은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 대회는 미국의 전설적인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가 출전한 대회였다. 그 대회에서 맥 로빈슨은 육상 200미터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재키 로빈슨 역시 형과 같이 여러 종목에서 뛰어난 운동능력을 발휘했다. 재키 로빈슨은 야구는 물론이고 미식축구, 농구, 육상, 테니스 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는 대학생 시절 이 종목들에게 다수의 우승 경험을 했다. 그만큼 운동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인종차별 속에 그는 그 재능을 더 크게 발휘할 수 없었다. 실제 그는 학창 시절 경찰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다 처벌받기도 했다. 이런 경험 탓인지 그는 운동경기 보조 감독으로 취업하는 등 프로선수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를 더 넓은 무대로 이끈 건 프로야구였다. 그의 운동 재능을 눈여겨 본 프로야구 구단의 관계자가 그와 연결됐다. 재키 로빈슨은 흑인들로만 이루어진 니그로 리그 팀에 영입돼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경험을 쌓은 재키 로빈슨은 지금의 LA 다저스의 전신은 뉴욕을 연고로 한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인 브렌치 리키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은 그의 메이저리그, 그리고 미국 역사를 뒤흔드는 일이 됐다.

그 자리에서 브렌치 리키는 재키 로빈슨에게 인종차별을 견딜 수 있을지는 물었다. 또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견디고 견딜 수 있을지를 함께 물었다. 그는 사회에 만연된 인종차별의 분위기가 재키 로빈슨의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어렵게 할 수 있음을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인종차별에 강하에 대응하고 행동한다면 또한, 리그에서 버틸 수 없음도 알고 있었다.

브렌치 리키는 재키 로빈슨의 의지를 시험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재키 로빈슨은 그의 제안을 수용했고 선수 계약을 했다. 브렌치 리키로서는 큰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최초의 흑인 선수를 기용한 프로야구단이라는 상징성에 주목했을 수도 있다. 이슈를 선점하고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게 마케팅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에 따른 큰 비판과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이었다. 브렌치 리키는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선수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저스에 입단한 재키 로빈슨은 1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 후 1947년 4월 15일 역사적인 메이저리그 데뷔 경기를 했다. 그의 등장에 여론은 찬반으로 엇갈렸다. 백인들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그의 도전에 응원과 기대를 하는 여론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우려와 비난, 증오와 혐오도 함께 했다. 흑인 선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분위기는 경기장 관중들은 물론이고 상대 팀 선수들과 동료 선수들도 심판들에게 있었다. 심지어 흑인 선수가 있는 팀과 경기를 보이콧하겠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역사적인 첫걸음이었지만, 재키 로빈슨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편견, 혐오를 이겨내야 했다. 

재키 로빈슨에 대해 상당수 심판들은 차별적 판정을 했고 상대 선수들은 노골적으로 그의 플레이를 방해했다. 투수들은 의도적으로 그의 몸을 맞히는 공을 던졌고 수비 시에는 상대 선수가 슬라이딩을 하면서 고의로 그의 발목에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가 주자로 나갔을 때는 발길질을 하는 등의 비 매너 플레이를 당하기도 했다. 이런 부당함에 재키 로빈슨은 대응하기 보다 플레이에 집중했고 실력으로 극복하려 했다. 실제 그는 공. 수를 겸비한 2루수로 뛰어난 기량을 과시했다. 점차 그를 흑인이 아닌 야구 선수 재키 로빈슨으로 보는 시선이 늘어났다. 특히, 그의 팀 동료들부터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1947년 5월 14일 브루클인 다저스가 신시네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를 치르는 날 역사적인 장면이 있었다. 그 지역은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이 극심한 지역 중 하나였다. 흑인 선수의 등장에 홈 관중은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고 흑인을 비하하는 구호를 외쳤다. 홈 팀 선수들도 재키 로빈슨에 야유를 했다. 험악한 경기장 분위기 속에서 당시 다저스의 유격수 피 위 리즈에 나섰다. 그는 재키 로빈슨과 어깨동무를 하며 동료애를 보였다. 백인 선수의 이런 행동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고 경기장 분위기를 일순간 얼어붙게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인종차별의 극복을 상장하는 일이었고 재키 로빈슨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42"에서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피 위 리즈는 팀 내에서 재키 로빈슨에 대한 비토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고 오직 선수로서 재키 로빈슨을 대한 선수였다. 

그의 행동은 다른 팀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재키 로빈슨은 데뷔 시즌 내내 곳곳에서 살해 협박이나 각종 위협에 시달렸다. 그가 경기에 나서는 것 자체를 저주하는 백인들이 많았다. 그의 동료들은 이런 재키 로빈슨을 격려하고 연대했다. 어떤 선수는 다저스 모든 선수들이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을 달고 나오면 재키 로빈슨이 누군지 모르지 않겠냐는 농담을 건네며 동료들이 그와 함께 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이 말을 훗날 메이저리그 중요한 행사로 이어졌다. 

이렇게 긍정과 부정적 시선이 공존했던 환경에서 레키 로빈슨은 매우 뛰어난 선수로 활약했고 흑인 선수들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가 프로에 데뷔한 1947년 이후 1948년부터 다수의 흑은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외로웠지만, 그는 더는 외롭지 않게 됐다.

재키 로빈슨은 다소 늦은 28세의 나이에 프로에 데뷔한 탓에 선수 이력을 오래 쌓지 못했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고통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수차례 올스타로 선정됐고 리그 MVP의 영예도 않았다.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가 되기도 했다.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57년 은퇴를 선언했고 스포츠는 물론이고 흑인 인권운동 등 사회 활동가로도 활동했다. 그 기간 그는 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선수의 큰 영예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사회 여러 부분에서 활동하던 재키 로빈슨은 1972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작은 험난했지만, 그는 은퇴 후에도 그 업적을 인정받고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남았다. 그런 재키 로빈슨이 처음 메이저리그 경기에 나선 4월 15일은 흑인 선수 한 명이 메이저리그 경기네 나선 게 아니라 미국의 오래된 악습인 인종차별의 벽을 허무는 첫걸음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할 수 있다. 재키 로빈슨 데이는 1997년 그가 메이저리그 경기에 나선 50주년이 되는 해에 제정됐다. 그가 달았던 등번호 42번은 이후 전 구단 공통의 영구 결번이 됐다. 

이에 더해 재키 로빈슨 데이에서는 2009년부터는 4월 15일 되면 메이저리그 모든 선수들의 코치진, 심판을 포함해 경기장에 나서는 모든 이들이 등번호 42번을 달고 재키 로빈슨을 기억하고 그의 야구 인생을 기리고 있다.  애초 2007년부터 이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처음에는 흑인 선수들이 등번호 42번을 달았고 이후 그 취지에 모든 메이저리그 구성원들이 공감하면서 메이저리그 전체의 행사로 발전했다.

 



이를 통해 메이저리그는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과거 그가 인종차별과 그로 인한 각종 협박과 위협에 시달리던 당시 그의 동료가 농담처럼 제안했던 일이 긴 세월이 흘러 실현됐다. 그는 외롭게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리고 힘겹게 열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지금은 전혀 외롭지 않다. 

재키 로빈슨은 삶은 결코 그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던 탓에 큰 위험도 이겨내야 했고 험난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위대한 야구선수가 되면서 흑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실력으로 이겨냈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면서 메이저리그는 흑인을 포함해 남미, 아시아인들 다양한 인종의 공존하는 말 그대로 메이저리그 리그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메이저리그 데뷔 당시에도 사회에 만연된 인종 분리 정책과 차별 정책을 전환시키는 계기도 마련했다.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폭풍우 가득한 날씨 속 힘겨운 날갯짓이었지만, 그 파장은 엄청난 폭풍이 되고 미국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큰 요소가 됐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한 선각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키 로빈슨은 보여줬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는 인종을 포함해 성별, 계층별, 민족별로 상대를 차별하오 혐오하거나 박해를 가하는 일이 여전히 존재한다. 자유 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시작된 미국 역시 인종차별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그와 관련한 이슈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이를 극복하는 데 힘써야 하는 정치인들이 정치적 이익과 권력을 위해 증오와 혐오를 조장하는 일도 있다. 그렇게 커진 서로에 대한 갈등은 결국 그 사회를 병들게 하고 그에 따른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한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혐오는 결국 자기 자신과 사회의 피해로 돌아온다. 재키 로빈슨과 같은 선각자가 등장하지 않더라고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 지성으로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사회를 건강하게는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재키 로빈슨의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진 : 픽사베이,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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