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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과 쌍벽을 이루는 남미의 대국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후안 페론을 들 수 있다. 그는 1943년 군부 쿠데타로 권력의 중심에 섰고 1946년부터 1952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다. 이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이후 오랜 세월 해외 망명 생활을 하다 1973년 대통령 선서에 당선되며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창한 페론주의는 외국자본의 배제, 국가 기간산업의 국유화, 복지 확대와 임금 인상 등을 통한 노동자의 수입 증대를 주 내용으로 한다. 이 페론주의는 전형적인 대중영합 정책, 포퓰리즘이고 이로 인해 아르헨티가 경제가 몰락을 길을 걷게 됐다는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몰락이 오랜 세월 정권을 장악했던 군부 세력의 지나친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인한 해외 자본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에 따른 외채 부담, 극심한 빈부 격차에 따른 부의 편중 심화 등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는 반론도 있다.

이 페론주의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그가 활동하던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 정치에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중요 정치 세력 중 상당수는 여전히 페론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그만큼 후안 페론의 영향력은 살아서도 그가 세상을 떠나서도 여전히 아르헨티나 국민들 삶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에바 페론

 



하지만 후안 페론의 존재감 이면에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서는 특히, 서민들 사이에서는 성녀라는 의미의 에비타로 불리는 그는 가난한 유년기를 거쳐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으로 20대 나이에 대통령 영부인 그리고 불과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그 삶 자체가 드라마이고 영화였던 에비타는 이후 영화로, 뮤지컬의 소재가 되고 있고 큰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삶은 굴곡 많았던 아르헨티나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에비타는 1919년 비옥한 토지가 있는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농업과 목축업 지역인 팜파스의 한 농장 지주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농업과 축산업은 아르헨티나 경제의 중요한 산업이었고 농축산물의 수출로 경제적 호황을 이룰 수 있었다.

19세이 후반부터 아르헨티나는 노동력 확충을 위해 이민자를 적응 수용하는 정책을 지속했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넓은 농장 지역에서 일했고 농축산 산업 발전의 근간이 됐다. 그 속에서 대농장 소유자들이 대 지주가 됐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이는 부의 편중 현상을 급속히 진행되도록 했다. 

농장주의 딸로 태어난 에비타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미 결혼을 상태에서 에비타의 어머니를 만났고 가정을 이루긴 했지만, 에비타가 10대로 접어든 시절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졸지에 에비타는 사생아가 됐고 어머니와 남겨진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에비타 이미지

 



그 속에서도 에비타는 굴하지 않고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위해 10대의 나이에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상경했다. 하지만 그곳에 아무런 연고가 없고 배우로서 성장하기 위한 제대로 된 준비를 거치지 못한 에비타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며 긴 무명생활을 거쳐야 했다. 당시 배우를 포함한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고 여성 배우들은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거나 각종 성폭력에 노출되기 일쑤였다. 에비타 역시 그런 환경을 견뎌내야 했다. 이런 무명배우 시절은 이후 에비타가 유명인이 된 후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과거가 됐다. 

이런 에비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43년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던 라디오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에비타는 개성 있는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라디오 드라마 성공을 바탕으로 에비타는 주목받는 대중 스타가 됐다. 그 활동 영역도 크게 확대됐다.  

스타가 되는 꿈을 이룬 에비타의 삶에서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1944년 그에게 찾아왔다. 1944년 아르헨티나의 대지진이 발생했고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지진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한 구호 기금 모금 행사에서 에비타는 아르헨티나를 통치하던 젊은 군부 세력의 실력자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후안 페론은 노동복지부 장관이었고 적극적인 친 노동자, 친서민 정책으로 주목을 받고 대중적 지지를 얻어 가는 정치인이었다. 

두 사람은 그 행사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고 이내 연인이 됐다. 하지만 후안 페론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48세의 중년이었고 에비타는 불과 24세의 나이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당연히 방송과 언론,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비정상적 관계라는 비판도 받을 수 있었다.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에비타에게 후안 페론은 더 높은 신분 상승을 이뤄줄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후안페론과 에비타

 



하지만 성공을 위한 의도적 접근이라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미 에비타는 대중 스타로 성공의 길을 걷고 있었고 앞으로 미래가 기대되는 연예인이었다. 불필요한 스캔들에 휩싸이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후안 페론이 미모의 대중 스타를 이용해 자신의 인지도와 대중성을 높인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정치적인 동지로 공동 운명체가 됐다. 후안 페론은 대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최저 임금제 도입과 함께 지금도 아르헨티나에서 시행 중인 연말 특별 보너스 지급, 노동환경 개선, 고용안정 보장 등을 시행했다. 이는 극심한 빈부 격차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고통받던 서민층에게는 큰 희망의 빛이었다. 후안 페론은 서민층과 노동자층에게 큰 지지를 얻었고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이런 후안 페론의 급부상은 대지주, 자본가 등 기득권 층, 그들과 연결된 군부 세력에는 큰 위협이었다. 1945년 대통령 선거를 얼마 안 남겨둔 시점에 후안 페론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 실각했고 체포되어 구금되는 처지가 됐다. 이대로 정치생명이 끊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의 지지자들이 대규모 시위로 그를 지지했고 국민적 여론도 후안 페론에게 유리한 흐름으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에비타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후안 페론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를 통해 에비타는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우호적인 여론을 바탕으로 구금 상태에서 벗어난 후안 페론은 에비타와 결혼해 정식 부부가 됐고 이후 함께 대통령 선거전에 나섰다. 아르헨티나 정치는 페론 대 반 페론의 구도로 재편됐다. 반 페론 진영은 후안 페론은 물론이고 에비타까지 강하게 공격하는 네거티브 공세로 맞섰다. 그 과정에서 에비타의 연예인 데뷔 시절 문제들이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서민층을 중심으로 한 페론에 대한 지지 여론은 매우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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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정치인 배우자가 선거전에 전면에 나서는 선택을 했고 전국을 돌며 유세에 나섰다. 그는 매우 뛰어난 언변과 매력적인 외모 등으로 주목받았고 후안 페론의 선거전을 이끌었다. 결국,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1946년 6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에비타 역시 26살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대통령 영부인의 자리에 올랐다. 

후안 페론은 대통령 취임 이후 그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외국 자본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 독립을 위해 외채를 모두 상환했고 국가 기간산업의 국유화, 앞서 언급한 친 노동자 정책을 적극 시행했다. 그와 함께 사회 복지 정책도 함께 시행하며 보편적 복지를 확대했다.

에비타는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대외 접촉과 소통을 담당하며 후안 페론을 지원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호,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그의 이런 활동은 대외적으로도 크게 알려졌고 유럽에서도 그의 존재감을 높였다. 에비타는 당시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대통령 영부인 신분으로 유럽 순방에 나섰고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큰 환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 있었고 전쟁의 피해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특히, 일반 서민들에게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을 하는 매력적인 젊은 영부인 에비타의 존재는 국경을 초월해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연설하는 에비타

 



이를 통해 에비타는 일약, 세계적인 인물로 떠올랐고 후안 페론은 이를 통해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반 페론 진영의 에비타에 대한 비판 수위도 높아졌다. 과거 연예인 시절의 스캔들도 다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에비타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변함이 없었다. 

에비타는 기존의 구호, 자선 활동을 더 확대하고 그에 필요한 자신의 이름을 딴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했다. 1948년 설립된 에바 페론 재단은 1950년 초반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그 내용에는 서민주택 건설, 생필품 지원, 적극적인 하층민 구호활동, 어른이 돌봄 서비스 확대, 이를 위해 어린이 테마파크 운영, 의료 서비스 강화를 위한 의료 인력 확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직접적인 복지 정책이었다. 이를 통해 에비타는 대중적 인기를 가난한 이들의 성녀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에비타라는 별칭이 생긴 이유다. 

하지만 에바 페론 재단의 활동과 관련해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선, 막대한 재원 마련 과정에서 자금의 불투명성이 점점 커졌고 막대한 세금이 이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기부금이 사실은 세금이 되는 모습도 있었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에 숨은 나치 전범들과의 검은 거래 의혹도 불거졌다. 이런 자금의 불투명과 부실한 회계는 반대파의 중요한 공격 대상이 됐다. 여론도 점점 비판적으로 변해갔다. 

문제는 비판적인 여론에 대한 대응에 있어 페론 부부의 방식이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페론 정권은 어린이 교육 과정에서 사실상의 페론 우상화를 반영하는가 하면,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고 선전전을 강화했다. 한편으로 친 페론 언론사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반대파를 탄압했다. 이를 통해 페론 정권은 사실상 언론 장악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양상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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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동시에 에비타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한층 더 강화시켰다. 그는 여성들을 위한 친 페론 계 정당을 창당했고 여성 참정권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아르헨티나는 1951년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됐다. 이는 여성들의 권리 강화라는 측면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서민과 노동자층 외에 여성들을 페론의 지지세력화하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흔들림이 있었지만, 후안 페론과 에비타의 정치적 공동체는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한번 승리하며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애초 이 선거에서 에비타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며 정치적 역량을 더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군부의 반대와 함께 에비타의 건강 악화로 부통령 지명은 철회되고 말았다. 

에비타는 대통령 선거전인 한창인 시점에 자궁암 판정을 받았고 병세가 크게 악화되고 있었다. 에비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선거전에 나섰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직접 투표를 하지 못하고 병실에서 투표함에 투표를 해야 할 정도로 암이 빠르게 진행됐다. 이런 상황에서 후안 페론은 에비타의 대중적 인기를 선거전에 이용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결국, 후안 페론이 재임에 성공했지만, 에비타의 삶의 불꽃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식에 함께 참석하긴 했지만, 그는 스스로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간신히 그 행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취임식 카퍼레이드에서는 몸을 세울 수 있는 특수한 장치에 의존해야 했다. 대통령 취임식 참석은 에비타가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인 마지막 장면이 됐다. 

1952년 7월 에비타는 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에 아르헨티나의 많은 국민들의 깊은 슬픔에 빠졌다. 엄청난 추모 인파가 그의 시신이 안치된 곳을 찾았고 긴 국장이 치러졌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맞는 삶이었고 생전에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던 젊은 여성 정치인의 삶이었다. 

하지만 에비타는 사후에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에비타의 유해는 페론 정권의 필요에 의해 미라로 제작됐고 대중들에게 공개됐다. 에비타의 높은 인기와 그에 국민들의 깊은 존경의 마음을 정치에 이용한 결과였다. 이후 에비타의 유해는 1955년 군부 쿠데타로 페론 정권이 붕괴되면서 자취를 감췄다가 1974년 이탈리아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됐다. 

 

 

 



군부정권은 에비타의 존재가 페론주의 지지자들의 구심점이 되는 걸 막아야 했고 여전히 해외 망명 중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후안 페론의 존재감을 사라지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에비타의 유해는 해외를 떠돌게 됐다. 다시 그 유해가 발견되고 1974년이 돼서야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유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공동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지금도 에비타가 잠든 묘지에서 많은 추모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고 그가 사망한 날은 뜨거운 추모 열기가 지속 중이다. 아르헨티나의 지폐에도 그의 초상화가 들어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에비타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린다. 여전히 가난한 자들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지만,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탄으로 이끈 추악한 악녀의 이미지도 존재한다. 분명한 건 에비타의 존재가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미치는 영향이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그에 대한 칭송과 비판도 그 영향력이 없다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아르헨티나는 장기간의 정치 불안과 극심한 빈부 격차, 심각한 외채 등의 문제가 겹치며 심각한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에는 엄청난 인플레이션 문제가 외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경제 불안은 사회적 불안을 심화시키고 치안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해외여행객들에게 아르헨티나는 매력적인 곳이지만, 각종 범죄로 인해 위험한 곳이 되고 있다.

에비타가 그 존재감을 보였던 떼와 지금의 아르헨티나는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여러 면을 함축하고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의 삶을 따라가면 아르헨티나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살필 수 있다.  



사진 : 위키백과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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