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남서부에 위치한 원주시는 치악산이라는 거대한 산으로 대표되는 도시로 서쪽으로는 경기도, 남으로는 충북과 맞닿아 있는 교통의 요지다. 원주는 영동, 중앙, 광주 원주 고속도로 등 3개의 고속도로가 지나고 최근 개통된 서울과 강릉을 연결하는 KTX 경강선이 지나고 있다. 또한, 원주는 역사적으로도 통일 신라시대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중 소경이 설치될 정도로 유서 깊은 도시이자 지역의 중심 도시였고 고려 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 강원도 감영이 설치될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다. 현재는 강원도의 혁신도시로 건강보험공단, 관광공사, 석탄공사, 국립공원공단, 건강보험공단 등 13개의 공공기관이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기업도시로서 다수의 공단도 입지하고 있어 많은 상주인구와 유동 인구가 혼재하는 도시다..
강원도 춘천은 호반의 도시로 불린다. 한강 수계의 댐들이 곳곳에 자리하며 인공 호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물은 춘천과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다. 이 댐들은 멋진 풍경을 만들어주었고 경춘 국도와 경춘선 열차가 있어 춘천은 관광 도시로 예전부터 많은 이들이 찾았다. 특히, 춘천 일대는 주머니 사정이 풍족하지 않았던 대학생들이 완행열차를 타고 함께 MT를 가는 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이런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많았던 탓인지 춘천에는 낭만의 도시라는 또 다른 칭호가 붙기도 했다. 춘천행 기차는 그 낭만을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현재 춘천은 강원도청 소재지로 기존의 관광의 도시를 벗어나 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의 각종 문화행사가 매년 열리는 문화의 도시로도 그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충청남도 금산은 충청남도 남동쪽 끝 내륙에 자리하고 있다. 금산은 북으로는 대전광역시와 동으로는 충북 영동과 남으로는 전북 무주와 접하는 지리적 특성이 있다. 그 때문에 금산은 행정구역 상 충청남도에 속해있지만, 그 생활권이 대전과 전북 무주에 속하는 특이점이 있다. 금산은 주변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금강 지류 하천이 있어 비옥하고 넓은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런 비옥한 토지가 있는 금산은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했고 아울러 인삼의 산지로 그 이름이 높았다. 개성인삼, 강화 인삼과 함께 금산의 인삼은 우리나라는 대표하는 인삼 산지이기도 하다. 최근 금산은 대전, 통영 고속도로가 지나면서 접근성이 더 좋아졌고 도시 사람들은 금산의 인삼을 직접 만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
부산은 바다의 도시다. 부산항은 제1위 항구고 여전히 그곳을 통해 수많은 물자들이 오가고 있다. 6.25 한국 우리의 급속한 산업화 당시 부산은 수출 항구로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 부산은 멋진 바다 풍경이 함께 하는 여행지이기도 하다. 해마다 여름이면 부산의 해수욕장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부산의 바다 풍경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바다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부산은 많은 자치구들이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이 중 수영구는 조선시대 수군의 주둔지였던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영이 위치했다. 해안선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지형으로 수영만이라는 이름이 붙는 이곳은 수군의 물 수자와 절도사영의 영자를 합해 수영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바다의 도시 부산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 할..
국내 제1의 항구 도시 부산은 작은 항구 도시였지만,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도시로 발전했다. 낙동강 전선이 최후의 보루가 되면서 부산은 임시 수도로 기능했고 전쟁을 피해 다수의 피난민들이 몰렸다. 그 피난민들은 곳곳에 터전을 만들고 정착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상당수 사람들은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전후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와중에 부산은 수출 항구가 됐고 도시의 발전도 빠르게 진행됐다. 지금은 인구 300만 명이 훨씬 넘는 대도시가 됐다. 부산에서 영도구는 특이하게 국내 유일의 섬으로 이루어진 자치구다. 다리로 연결되어 육지와의 통행이 원활하지만, 대도시 속 섬이라는 특색이 있다. 과거 영도구는 절영도로 불렸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을 정도로 긴 역사가 있는 곳이다. 고..
서울의 도심을 흐르는 하천 청계천은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으로 그 상징성이 매우 컸다. 조선은 왕조 초기부터 하천의 폭을 넓히고 제방을 쌓는 등 청계천을 지속 관리했었다. 영조 임금 때는 국책 사업으로 대규모 준설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요한 청계천이었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하천은 그 원형을 잃어갔다. 복개공사를 통해 하천은 그 원형이 파괴됐다. 우리 현대사의 산업화 시기 구간 전체가 복개되어 도로가 생기고 고가 도로가 건설되어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인왕산 자락의 백운동 계곡에서 발원해 도심을 거쳐 중랑천으로 흘러가는 청계천은 과거 기록 속에만 남은 하천이었다. 청계천은 2000년대 들어 복원 움직임이 커졌고 2003년 청계 고가도로의 해체를 시작으로 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