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관련한 뉴스를 접할 때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 야스쿠니 신사다. 1869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 내전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장소로 그 역사가 시작됐고 1879년 일왕에 의해 지금의 이름이 하사되어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은 장소가 됐다. 하지만 실상은 그곳에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 이에 앞장섰던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고 일본 침략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과 대만인들까지 이곳에 합사되어 있다. 형식은 민간 종교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일본 극우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는 장기간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의 수상 정치인들이 주기적으로 이 신사에 방문해 참배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물론..
범죄 심리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 반환점을 돌아 후반부 7, 8회를 방영했다. 7회와 8회에는 2,000년대 초반 온 나라를 공포와 경악 속으로 빠뜨렸던 2명의 연쇄 살인범 유영철과 정남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두 살인마는 당시 마치 경쟁을 하듯 무고한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철저히 존재를 감추며 장기간 범행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연쇄 살인 사건이었다. 당시 경찰은 이들의 검거를 위해 온 역량을 집중했지만, 새로운 범죄에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에 경찰은 상당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나날이 지능화되고 진화하는 범죄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이 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범죄 행동 분석, 프로파일러의 영역이 확대되는 계기였다. 7, 8회에서는 구영철이라는 이름을 나온 유영철 ..
이방원이 유약함을 떨쳐내고 본격적인 권력 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 건국의 중요한 공신이었지만, 아버지 이성계의 뜻을 거스른 정몽주 격살을 주도한 이유로 이성계의 눈밖에 난 이방원은 아버지와 멀어진 거리에 좌절했다. 여기에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이방원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더 커졌다. 이런 원망의 마음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이방원은 점점 권력에서 멀어졌고 그를 견제하는 신덕왕후에 그 입지가 점점 줄어들었다. 신덕왕후와 이성계는 나이 어린 세자에게 이방원이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임을 알았다. 그에 대한 견제는 점점 더 강해졌고 이방원은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처가의 안전까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이방원은 숨죽이며 살아가던가 자신의 자리를 되..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격 침공으로 우크라이나가 국제 뉴스에 중심으로 떠올랐다. 우크라이나는 흑해를 접하고 있고 넓은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밀 생산지다. 이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를 놓고 제2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쟁이었던 독. 소 전쟁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혈투를 벌이기도 했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서유럽의 집단 방위 체제인 나토가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러시아가 충돌하는 갈등의 장소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을 원했고 친 서방 노선을 걸었다. 그들과 국경을 접한 러시아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이런 두 진영 간의 대립은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어졌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향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
베트남전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발발한 6.25 한국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미군이 해외 파병된 전쟁이었다. 우리나라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투병을 파병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나섰고 1964년부터 1973까지 10여 년 동안 베트남전을 지속했다. 이 기간 베트남과 인근 국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보다 많은 폭탄이 쏟아졌고 당시 최고의 첨단 무기가 사용됐다.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가 있었다. 이런 엄청난 희생에도 미국은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사실상 패전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베트남의 공산화됐고 인근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그 길을 걸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현대사의 큰 오점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두고 가장 그림자가 긴 전쟁이라는 말을 평가를 하는 이유..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왕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은 그의 뛰어난 자질과 함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수립한 강력한 왕권이 있어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게 보통의 평가다. 세종대왕은 건국 후 권력의 주도권을 놓고 왕권과 신권의 대립했고 왕자들 사이에서도 대립이 있었다. 이는 유혈 충돌로 이어졌고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조선을 설계한 개국공신 정도전도 권력 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조선 건국한 이성계 역시 사실상 아들 이방원에 밀려 권자에서 물러나 쓸쓸한 노년을 보내야 했다. 치열한 권력 투쟁을 이겨낸 이방원은 정도전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정승들이 주도하는 정치 시스템인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왕이 주도하는 6조 직계제를 채택하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외척이든 공신이든 숙청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