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에서 최악의 독재자로 손꼽히는 인물은 단연 나치 독일을 이끌었던 독재자 히틀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으로 전 세계의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더해 인종주의를 통치 전면에 내세웠다. 나치 독일은 편협한 민족주의에 근거해 아리아인들을 가장 우월한 민족으로 여기고 타 민족에 대한 억압과 탄압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유대인 외에도 유럽 내 소수 민족들은 나치 독일에 큰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유럽은 철저히 파괴됐다. 독일과 동맹 관계에 있었던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한국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수탈을 당했다. 중국은 거의 전역이 전장이 됐고 수많은..
코로나 사태 전 터키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여행지 중 하나였다. 멋진 자연과 동. 서양이 교차하는 독특한 문화 전통, 6.25 한국 전쟁 참전 등의 이유로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칭하는 현지의 우호적 분위기도 터키에 대한 친밀감을 높였다. 그중 이스탄불은 대표적 관광지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이 나뉘고 아프리카와도 연결되는 지리적 위치는 이스탄불을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 만들었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스탄불을 소개하는 각종 프로그램이나 영상을 보면 이슬람의 문명과 서양의 문명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이스탄불은 로마제국 시대 그 이름을 바뀌기 전까지 비잔티움이라 불렸고 이후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콘스탄티노폴리스나 콘스탄티누폴리스 등으로 불렸다..
아프리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때묻지 않은 자연, 광활한 대지,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땅이다. 그 이면에 심각한 기아와 가난, 내전 등 부정적 이미지도 함께 한다. 이에 더해 여전히 미개하고 문명과 거리가 먼 빈곤의 땅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진다. 이는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으로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인류 문명이 시작된 땅이고 현재 50개국이 넘는 나라에 3,000 민족이 공존하는 다양성의 땅이고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아직 잠재력이 풍부한 가능성의 땅이기도 하다. 지금 아프리카의 상황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들의 침략과 수탈의 산물이기도 하다. 지금 아프리카의 비극적인 상황은 결코 아프리카인들이 게으르고 나약해서 무능해서 생긴 일이 아니다. 지금의 아프리카를 이해하기 ..
이성계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가 조선의 막후 실력자가 된 신덕왕후 강씨는 강. 온 양면 책을 활용하며 위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의 소생인 장성한 다섯 아들의 존재는 큰 위협이었다. 이성계도 신덕왕후 강씨에게 힘을 실어줬다. 세자 책봉에서부터 신덕왕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던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 사이에 낳은 다섯 아들을 권력에서 멀어지게 했다. 즉위식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아들들과의 만남을 거부했고 조선 건국 공신에도 아들들을 제외했다. 이성계는 아들들을 아버지와 자식이 아닌 왕과 신하의 관계로 설정했다. 신하와의 관계도 정적과도 같이 대했다. 나이 어린 세자에게 아들들은 부담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특히,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장원급제자로 문신의 길을..
1840년 일어난 영국과 중국의 전쟁인 아편전쟁은 전쟁의 이름에서 보듯 보통의 전쟁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마약이라 할 수 있는 아편이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은 세계사에서 범위를 좁히면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이 전쟁에서 영구에 패한 청나라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긴 세월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이 무너지는 계기가 됐다. 중국에 승리한 영국은 제국주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중국은 서구 열강들과 심지어 일본의 침탈을 받으며 그들의 이권 대결장으로 전락했다. 중국은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관 속에 포함됐고 동서양의 균형을 무너졌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열렸고 그 서구 중심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우..
고려 왕조의 수호를 이끌었던 정몽주가 격살되면서 새로운 왕조 건국의 흐름을 막을 장애물이 모두 사라졌다. 실제 역사에서도 정몽주가 세상을 떠나고 3개월 후 조선이 건국됐다. 이제 이성계가 용상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였다.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손에 넣은 급진파 사대부들을 빠르게 움직였다.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 세력과 맞섰던 공양왕은 기울어진 분위기에 전의를 상실했다. 구심점을 잃은 온건파 사대부 세력도 더는 힘을 쓰지 못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 사대부는 고려 왕실을 압박해 선위를 이끌어냈다. 사실상의 왕위 찬탈이었지만, 선위의 형식을 통해 새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조금이나마 확보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는 걸 주저했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역사의 흐름을 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이미 고려왕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