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남부의 내륙에 자리한 부여군은 금강 지류의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있어 예로부터 농업이 흥한 풍요의 땅이었다. 금강을 따라가며 만날 수 있는 자연경관도 수려하다. 부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건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 지금의 공주에서 사비, 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면서부터다. 부여는 그 이후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사비시대 백제는 나라를 다시 부흥하고 수준 높은 문화, 예술을 발전시켰다. 비록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각종 유적과 유물은 백제의 옛 영화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부여 지역의 부소산성과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등의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고대 왕국 백제의 흔적을 담고..
지금의 만주 요동지역을 장악했던 고구려에게 중국 세력과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과 성장기에 만리장성 넘어 중국 북방의 여러 이민족과 맞서야 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적 위기도 있었지만, 광개토대왕와 장수왕 시대를 거치며 그들의 대결을 이겨내고 요동 지역의 맹주로 자리했다. 고구려는 그들의 왕을 태왕으로 지칭하며 독자적 천하관을 유지하는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굴림했다. 하지만 중국에 통일 왕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한차원 높은 상대와 대결해야 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당시로는 세계 최강국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그들에게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중화사상속으로 편입되지 않았다. 이런 고구려가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북방 이미족들과 연결되면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
경기도 군포시는 북으로 안양, 서로 안산, 동으로 시흥에 둘러싸여 있는 수도권의 도시로 행정구역 상 단위 면적이 전국 세 번째로 작은 도시다. 1989년 시로 승격되었을 만큼 도시의 역사도 길지 않다. 하지만 군포시는 그 안에 과거 농촌의 풍경과 구도심, 산본 신도시가 함께 모여 있는 다양성 가득한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19회에서는 이 군포시의 이런저런 면과 이웃들을 만났다. 이른 아침 군포역에서 나와 과거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 앞에 섰다. 1919년 3월 31일 군포라는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의 큰 장이었던 군포장에서 약 2천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3. 1운동이 일제의 무력을 동원한 탄압으로 그 열기가 식어가는 ..
지금은 우리 영역이 아닌 만주지역을 호령하던 고구려는 인접 이민족과 중국 왕조들과 국경을 접하면서 그들과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고구려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보다는 강하게 맞서며 영토를 넓히고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런 고구려의 성장 배경에는 오랜 세월 계속된 중국의 분열이 있었다. 한나라 멸망 이후 위 진 남북조, 5호 16국의 혼란 속에 고구려는 만주지역의 패권을 공고히 하고 남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며 한강유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6세기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 국가로 발전한 신라가 진흥왕 시기 국력을 강화하면서 고구려를 위협했다. 진흥왕의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함께 공격했고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독자적으로 한강..
1987년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군사 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한 국민들의 열망이 폭발한 폭풍 같은 시기였다. 1979년 12. 12 군사 반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힘으로 이를 제압하려 했지만, 분출되는 국민들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그해 6월 29일, 국민들이 요구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끈 정권의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공권력에 희생되고 큰 고통을 받았다. 87년 6월 민주 항쟁은 그런 희생이 쌓이고 쌓여 이뤄낸 성과였다. 그리고 그해 6월의 열기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한 청년의 죽음이 있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6월 항쟁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
서울 용산은 한강과 맞닿아 있고 위로를 서울 종로로 아래로는 강남과 연결되는 말 그대로 요지 중 하나다. 하지만 용산은 이런 지정학적 위치를 긴 세월 외국 군대가 이용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땅에 들어온 청나라 군이 주둔한 지역이 용산이었고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러. 일 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했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식민 지배를 명확히 이렇게 일제에 의한 강점기 기간 용산은 일본군의 대륙 침략을 위한 후방기지로 기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일제가 물러난 후에는 미군이 최근까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긴 우리 근현대사에서 용산은 외국 군대가 주둔한 역사로 채워졌다. 미군이 평..